드라마의 작가주의 시대가 도래했는가. 몇 년 전만 해도 새 드라마를 홍보할라치면 그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 이름이 그 전선에 서기 마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비슷한 드라마들이 여주인공과 '실장님' 이름만 바꾼 채 등장하기가 일쑤였고 시청자들 역시 신데렐라 스토리에 후덕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졌다. 거기서 거기인 시나리오를 가지고서는 아무리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톱스타와 함께라도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80년대 생인 필자에게 있어 그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인정옥 작가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부터였다.
물론 이전에도 김수현 작가 등이 그 아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네 멋대로 해라>처럼 배우들보다 작가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같은 분위기 속에 <인어아가씨>의 임성한,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경희,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도운 등 스타 작가들이 탄생하거나 새롭게 주목받았다.
작가의 이름을 내건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드라마 작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존재였고 독특한 스타일로 인정받은 작가들은 일정한 단골 시청자들을 보유한 상태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야기 자체의 중요성을 깨달은 방송사가 스타작가 발굴에 앞장서면서 시청자들은 다양한 스타일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숨겨진 진실에 대한 다른 이야기
▲ <하늘이시여> |
ⓒ2006 sbs |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계속 다음 회를 보도록 하는 것은 그 드라마가 보유하고 있는 '어떤 비밀'에 있다. 그 비밀은 때로는 등장인물들은 모르되 시청자들은 아는 것이며 혹은 등장인물도 시청자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흔히 등장하는 출생이나 삼각관계의 비밀은 시청자들은 모두 알지만 등장인물들은 죽어라 모르다가 마지막에서야 알게 되어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게 하는 장치이다. 이에 반해 마치 추리물처럼 무언가 비밀이 있음을 암시하면서도 시청자조차 그것을 알 수 없어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비밀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임성한 작가가 즐겨 쓰는 '비밀'은 출생 및 혈연관계의 비밀이다. 현재 방송중인 <하늘이시여>는 한 중년여성이 어릴 적 잃었던 딸과 함께 살기 위해 그 사실을 숨기고 딸을 현재 자신의 아들(실제로 낳지는 않은)과 결혼시킨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거 <인어아가씨>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한 여성이 배다른 언니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보다 자극적인 정도에 있어 그 강도가 세졌다. 그와 같이 파격적인 설정을 기본으로 하고 이로 인해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와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 <굿바이 솔로> |
ⓒ2006 kbs |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의 비밀은 한 마디로 말하기가
다소 힘들다. 등장인물 각자가 서로 다른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상황을 모두 설명하면 장황해질 것이니 간추려 말하자(자세한
이야기는 드라마 공식홈페이지http://www.kbs.co.kr/drama/
goodbyesolo/index.html 참고).
주요 7명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과거의 상처들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그 상처는 부모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 친구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져야 할 사람들 사이의 상처라고 해두자.
두 작품의 차이점은
앞서 말한 '누가 비밀을 아는가'이다. <하늘이시여>의 경우 이미 제작 단계에서부터 파격적인 설정으로 화제가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비밀'은 등장인물들만 제외하고 모두 아는 비밀이 되었다.
시청자들은 이 중년여성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언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까
함께 노심초사하면서 드라마를 지켜본다. 덕분에 모든 상황은 '그 비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드라마에 대한 집중력 또한 거기서 발생한다. 이런
드라마의 경우 진실이 드러나는 시점에 이르러 시청률이 최고조에 이른다.
<굿바이 솔로>는 이와는 달리 '함께 비밀을
찾아보자'의 상황으로 시청자를 초대한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물인 오 여사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오 여사는 겉으로 보아 '잘
나가는 사모님'이다.
그러나 실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데 이를 속이고 결혼했다는 죄로 남편에게 정신병자 소리를 듣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늘 소위 '쿨하게' 큰소리치고 자신감이 넘치지만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늘 잘해도 '늘 거짓말하는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이것은 오 여사의 첫 번째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제 시청자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마주치는 오 여사를
만나고 있다. 더 깊숙이 숨겨져 있었던, 그녀를 거짓말하는 사모님으로 만들어 버린 아픈 상처가 서서히 드러나려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오
여사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비밀 역시 한 꺼풀씩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진정한 승자는 누가 될까
이처럼 다른 비밀과 진실을 지닌 두 드라마는 시청률에 있어서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늘이시여>는
30%대를 넘나드는 시청률을 자랑하며 소위 인기 드라마의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쏟아지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굿바이
솔로>는 10%대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드라마의 편성과 주요 시청자들의 연령 등 두 드라마를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전제하고라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어쩌면 그 차이는 숨겨진 진실의 파급 효과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이시여>에서는 비밀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와 인물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 설정 자체의 파격성 때문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드라마
내에서 일어날 파급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서 현재 주인공들은 전에 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굿바이 솔로>에서의 '비밀누설'은 상대적으로 잔잔하게 비춰진다. 그것은 그 비밀이라는 것이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는 함구된 것이라 할지라도 비밀의 주인공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비밀, 즉 과거의 상처를 알게 된
후에도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아, 그랬구나. 힘들었겠다'이다. 그런 점에서 그 비밀이란 것은 사실 드라마 내에서 반응한다기보다 시청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두 작가가 그 비밀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진실과 그 과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하늘이시여>의 비밀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어아가씨> 때부터 끊임없이 전해주고 있는
소위 대한민국 상류층의 생활정보 외에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잘못은 자식으로 되물림되며 정상적인 가정을 해친다'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드라마의 모든 이야기가 그 비밀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각 인물들 역시 그 비밀들로 인해
존재하면서 가벼움을 떨칠 수 없다. 즉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관계를 맺고 있지만 모든 것이 '그 비밀'을 위해 형성된 것으로 그 부분을
제외하면 각각의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이시여>의 인물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은 '저 사람의 과거는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곧 '비밀을 위한 비밀'과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일 뿐이다.
<굿바이 솔로>의 경우 이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 '7명이 모두 주인공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내면을 가지고 있다. 그 깊이는 그들이 간직한 아픈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 가운데에서 드러난다. 각자의
존재감은 다른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색깔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시청자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비밀 그 자체보다 한 사람으로서의 인물들
하나하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각자의 상처와 비밀로 얼룩진 내면을
숨기고 위태롭게 쿨한 척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자아가 <굿바이 솔로>의 인물들에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비밀이
시청자들에게 누설되었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대신 공감한다. 이 드라마를 통해 노희경 작가는 그의 앞선 작품들에서처럼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비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겠는가? 너무 뻔한 것이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하늘이시여!' 한탄하며 '왕자 커플'의 닭살 행각을
견뎌내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녹록하지 않은 삶과 너무나 닮아 있는 7명의 인물들의 비밀과 진실을 잠시나마 외면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서강대학교 방송문화비평 웹진 ZIME(www.zime.co.kr)에 공동개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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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4-02 12:28]'♡PINAYARN™♡ 【TODAY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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