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계룡산 연봉들. 가장 오른쪽 봉우리가 연천봉이다. |
ⓒ2006 안병기 |
▲ 향적전 처마의 물고기 공포 |
ⓒ2006 안병기 |
나무 물고기 날아오르다
_계룡산 갑사 향적전 처마 물고기 조각
갑사 향적전 처마 아래 물고기떼
아무리 고단해도
스님들보다 먼저 자리에 눕지 않습니다
밀려드는 수마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느릿느릿 헤엄이나 칩니다
그 광경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덧 나도 따라 물갈퀴질 합니다
잠깐 사이 절 마당이 냇물이 됩니다
몇 해 전 가을 해거름녘이었습니다
연천봉 아래로
둥근 해가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댕그랑 댕그랑 범종 소리
그 뒤를 허겁지겁 쫓아갔습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향적전 처마 아래 물고기 떼들도 푸르르르
저문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글쎄 제 마음도 어찌나 놀랐던지
홀연히 옷을 벗어버리더군요
누더기처럼 헤진 마음이
제가 두른 몇 겹 옷을
단번에 훌훌 벗어던졌습니다
마음이 옷을 벗는 것
그것이 바로 황홀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2006 안병기 |
*시작
노트*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보면 "사막은 벼락치기 애인에겐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산
역시 제가 가진 마지막 아름다움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연천봉에서 저녁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계룡산이 벼락치기 애인에게
끝까지 드러내길 주저하는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연천봉은 갑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높은 계룡산 봉우리다(738.7m).
연천봉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라. 논산과 공주 쪽의 산과 들이 호롱불처럼 붉게 타들어가고 백마강 강물이 마치 한 마리 물고기처럼 몸을 뒤척이며 은빛
비늘을 털어내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라. 일어나고 스러짐. 세상에 소멸의 순간만큼 사람의 마음을 저 낮은 곳으로부터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부르르
떨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어느 한 순간 그대의 마음속으로 연천봉이 걸어 들어와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마음 가운데에
좌정한 연천봉이 무거워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길고 아스라한 침묵으로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볼 뿐.
많은 사람들은
계룡산하면 갑사를 떠올린다. 갑사로 들어가는 오리 숲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그 길의 정다움을 알고 있다. 수백 년이나 묵은 늙은 나무들이
사람들과 함께 갑사 앞마당까지 동행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그러나 오리 숲이 진정 아름다운
것은 달밤이다.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휘영청 보름 달빛이 비칠 때 오리 숲은 제 품에 있는 수많은 나무 그림자를 길 위에 오롯이 풀어 놓는다.
그림자들이 보여주는 춤사위는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달빛이 보여주는 황홀한 풍경은 어디까지가 세상이고 어디부터가 선계(仙界)인지, 세상과 선계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친구와 더불어 처음 갑사에 왔다. 달빛이 흐드러지게 고운 밤이었다. 오리
숲을 걸으며 둘이 나눈 얘기의 내용들은 세월 속에 묻힌 지 오래지만 친구와 나란히 오리 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누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단발머리'란 노래 속에서 조용필은 "그 소녀 데려간 세월만 미워라"고 한탄한다. 세월이 소녀만 골라서 데려간다는 건 편견이다.
세월은 내 풋풋한 소년도 데려간 것이다.
갑사가 지닌 오랜 역사에 비해 그 전각들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 드물다. 향적전의 처마 아래
공포의 앙서 부분의 물고기들이 그나마 볼만하다. 향적전은 지금 요사채로 쓰고 있다.
불고기의 특성은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눈을
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찰에서는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잠자지 말고 항상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목어등을 장식해 놓는다. 추녀 끝에 매달려
청아한 소리를 내는 풍경의 끝에 물고기를 달아맨 것도 그 때문이다.
갑사의 전각을 둘러보고 나면 어느 전각에도 풍경이 달려 있지
않다는 걸 뒤미처 깨닫게 된다. 향적전의 처마 아래에 있는 물고기 공포가 풍경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 향적전은 일반인에게 접근이 허용돼 있지
않다. 향적전 공포를 보려면 대웅전 왼쪽 담을 짚고 슬쩍 넘겨다보아야 한다.
몇 년 전 갑사 주지 장곡스님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향적전 안으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CD 더미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장좌불와한 탓인지 핏기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황혼에 남겨진 나그네의 정서는 슬프다. 그 슬픈 정서로 뚫어지게 어스름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물고기 조각의 아가미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내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꺼림칙한가. 그렇다면 그대는 지나치게 빈틈이 없는 지성을 가졌다. 전설을 모르는
그대의 삶은 진정 행복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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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4-03 15:14]'♡피나얀™♡【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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