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패션】

선글라스 끼고 “날 좀 보소”

피나얀 2006. 5. 9. 22:03

 

 


[한겨레] 소심한 사람들 무안하게 더 크고 대담하고 화려해진 프레임… 얼굴 반을 가리는 스타일이 한국인에게 어울리는 게 다행이네

 

여기는 2006년 F/W 서울 컬렉션이 열리는 학여울 무역전시장. 막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의 쇼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반들반들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에서부터 휘황찬란한 액세서리들을 주렁주렁 매단 여자 탤런트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멋을 낸 셀레브러티들이 속속 도착한다.

 

지난 30년간 하루 평균 3시간 이상을 TV 시청에 투자하면서 살아왔지만 그중 뉴스를 시청한 시간은 8회분 미니 시리즈 방영 시간을 합한 것만큼도 되지 않을 이 몸도 척 보는 순간 탁 하고 알아챘을 만큼 유명한 정치인도 도착, 프런트 로에 자리를 잡았다.

 

패션쇼 참석자들이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잠시 암전. 쿵쿵 땅이 울릴 만큼 웅장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조명이 다시 밝아지면 첫 번째 모델이 무대에 등장! 바로 이때다. 재빨리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쓴다.

 

눈이 부실 만큼 햇볕이 내리쬐는 것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런웨이 위에 있는 모델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갑자기 웬 선글라스? 거참, 케이블 TV도 안 보시나. 요즘 케이블 TV만 켰다 하면 밀라노나 파리에서 열렸던 패션쇼 장면 나오더만. 왜, 그런 쇼의 맨 앞자리(이른바 ‘프런트 로’라 불리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큼지막한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냐는 이 말씀.

 

패션쇼를 얼마나 멋있는 옷들로 채우느냐, 또 얼마나 멋지게 치러내느냐에 따라 프레스들의 평가가 달라지고, 또 그들의 평가에 따라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해당 시즌 매출이 좌지우지되는 탓에 많은 사람들(카메라도 함께)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쇼가 진행되는 동안 유력 패션지의 편집장이나 에디터들의 표정을 살핀다.

 

그래서 패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판 나 <보그>의 편집장이나 에디터들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선글라스 뒤로 쇼를 보는 동안 일어나는 표정 변화를 숨기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텁거나 막강한 파워를 가진 디자이너가 만에 하나 형편없는 쇼를 펼칠 경우,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도 앞으로는 선글라스를 이용해 포커페이스로 거듭나야겠다.

 

사실 패션쇼장에서 선글라스를 적극 활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일단 그 물건을 사들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음, 패션 에디터답군)과 “어머, 멋 좀 냈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소심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런 인간이 어떻게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꼬?)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 까닭에 마음에 드는 선글라스를 발견하는 족족 사들이고는, 사시사철 외출할 때마다 선글라스를 가방에 챙겨넣지만 열에 아홉은 가방에서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다시 집으로 가져오는(‘선글라스를 쓰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을까?

 

햇볕이 그다지 많이 내리쬐는 것 같지 않은데 참을까? 그래, 다른 사람들 쓰면 같이 쓰자. 어? 저 사람도 썼으니까 나도 쓸까? 에이, 그래도 안 쓴 사람이 더 많은데 쓰지 말까? 아아, 사람들이 멋만 부린다고 속으로 흉보면 어떻게 하지? 에이, 쓰지 말자’) 일을 지난 몇 년간 되풀이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패션쇼장에서 선글라스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일석이조, 한 번도 세상 구경을 제대로 시켜주지 못했던 선글라스들을 활용해서 좋고, 쇼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나 디자이너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아서 좋고!

 

아무리 옷차림이 전략이고 외모가 능력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라고 해도 소심하기 짝이 없는 성정을 타고난 나머지, 가방이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선글라스를 선뜻 꺼내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우리 같은 사람들, 올봄과 여름엔 선글라스 쓰고 거리를 누비는 일이 더더욱 어려워지게 생겼다.

 

예전에 비해 그 수가 많이 늘어났지만 유럽 같은 곳에 비하면 아직도 선글라스 쓰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선 선글라스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데, 이번 시즌에 유행하는 선글라스들은 숫제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하는 <밀양아리랑> 가사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디자인 일색이니 말이다.

 


남성용은 여전히 보잉 스타일이 대세

 

지난 몇 시즌 동안 유행했던 1960년대 스타일과 지난 시즌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1980년대 스타일이 선글라스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 이번 시즌의 선글라스들은 훨씬 더 크고, 대담하고, 화려해졌다.

 

일단 눈에 띄는 것은 큼직한 사이즈. 이번 시즌에 출시된 대부분의 선글라스들은 눈과 광대뼈는 물론이고 볼 윗부분까지 모두 가릴 정도로 큰 사이즈를 자랑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썼던 선글라스처럼(쇼장에서 얼굴을 가리기엔 적격) 말이다.

 

프레임 컬러 역시 한결 대담해졌다. 블랙이나 브라운 일색이던 데서 벗어나 화이트나 핫핑크, 옐로 등 알록달록한 컬러 프레임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흔히 ‘뿔테’라 불리는 아세테이트 소재나 ‘철테’라 불리는 메탈 소재뿐 아니라 자개나 크리스털처럼 새로운 소재를 활용한 것들이나 여러 가지 소재를 믹스한 것(흔히 ‘다리’라고 부르는 템플 부분은 자개를 사용하고, 렌즈 프레임은 아세테이트로 만드는 등)도 눈에 띈다.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좀처럼 인기를 끌지 못했던 템플(‘안경 다리’라 불리는 그것)과 프레임 이음새 부분의 장식도 다시 등장했다. 이음새 부분에 옐로 골드를 이용해 브랜드 로고를 만들어 넣은 것은 얌전한 축에 속하고, 템플 전체를 아예 옐로 골드 장식물로 장식한 것이나 스와로브스키 같은 준보석을 다양한 모양으로 박아넣은 것들도 눈에 띈다. 장식물을 달지 않아도 충분히 화려한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템플를 무뚝뚝한 일직선이 아닌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킨 것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난해 여름, 남녀를 불문하고 스포티한 느낌의 보잉 선글라스(‘애비에이터 스타일’이라고도 한다)가 유행했던 것에 비하면 여성용에서는 보잉 선글라스의 인기가 약간 주춤해졌지만 남성용 선글라스에서는 여전히 보잉 스타일이 대세. 보잉 선글라스의 경우 지난 시즌과 비교해 디자인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사이즈가 더 커지고, 템플과 프레임의 연결 부분을 Y자 형태로 디자인하는 등 세세한 곳에서 변화를 꾀한 디자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번 시즌에 유행하는 커다란 타원형 프레임을 가진, 복고풍 선글라스들은 다행히 서양 사람들에 비해 발달된 광대뼈와 턱을 가진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썩 잘 어울린다(강직함이 뚝뚝 묻어나는 턱선을 갖고 있었던 재클린 케네디 역시 이런 선글라스의 추종자였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성스럽고 우아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역시 이런 스타일의 선글라스가 가진 장점.

 

단, 아무리 유행을 따르고 싶어도 지나치게 둥글고 넙적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나 특별히 섹시한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은 사람은 동글동글한 디자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각이 있는 프레임을 선택하는 게 좋다. 얼굴이 너무 길어서 걱정인 사람은 템플 부분이 화려한 선글라스를 선택하면 긴 얼굴로 향하는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

 

남들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선글라스 끼는 게 항상 망설여지는 소심한 사람들은? 쇼장처럼 컴컴한 곳에서라도 활용할 것(단, 눈이 나빠질 수 있으므로 주의할 것).

 


둥근 얼굴형은 각진 프레임이 제격

 

쇼의 말미, 오늘의 주인공인 디자이너가 무대에 정렬해 있는 모델들 사이를 걸어나온다. 옷의 정확한 컬러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콧잔등 부분을 잡고 선글라스를 내렸다 올렸다 하는 게 좀 귀찮긴 했지만 역시 쓰고 있길 잘했다. 한평생을 옷을 만드는 데 바쳐온 반백의 디자이너가 객석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를 할 때, 눈물이 찔끔 났던 것이다. 하마터면 큰 창피를 당할 뻔했다.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는 해도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패션 전문 채널의 ENG카메라에라도 잡혔다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OOO 패션쇼의 피날레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패션 에디터’라는 꼬리표를 단 내 사진이 잡지에 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장면을 다른 디자이너들이 봤다면 또 어떻고. 이번 컬렉션 기간에 쇼를 하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피날레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할 때마다 내가 앉은 쪽을 보며 우는지 안 우는지를 체크하거나, 울지 않을 경우 화라도 낸다면…. 그야말로 ‘어휴!’다, 어휴! 오늘의 일등 공신인 선글라스를 케이스에 넣어 가방에 챙겨넣은 다음 프레스룸으로 향한다.

 

프레스룸에서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고, 안녕들 하셨습니까? (아무리 쇼가 마음에 들었어도 너무 좋았다고 말하면 다른 디자이너들이 시샘할지도 몰라. 괜히 남한테 상처 줄 필요는 없지, 암. 말을 아끼자!) 괜찮은 쇼였지요?” “네? 아, 네!” 한마디 외에는 다들 묵묵부답. “전 또 다음 쇼를 봐야 해서 이만!” 머쓱해져서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여자 누구야?” “글쎄. 디자이너협회에서 나온 직원인가?”

 

흠, 다음 쇼부터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봐도 되겠다. 눈물 찔끔 정도가 아니라 프런트 로에 앉아 대성통곡을 해도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를 텐데 뭐. 아참! 나는 미국판 나 <보그> 편집장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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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21 2006-05-09 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