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그 한적한 공원엔 바람만이 순례하더라

피나얀 2006. 5. 13. 21:04

그 공원은 한적하다.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그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다. 섬처럼 도시의 중간에 들어서 있어 그럴까, 아니면 평일이라 그럴까. 둔산의 중심에 있는 샘머리공원을 들르던 날은 날씨가 화창하게 좋은 날이었다.

달력 한 장이 오롯이 넘어가는 5월을 맞은 첫날, 놀랍도록 날씨조차 변해 있었다. 잔인할 4월이 무색할 정도로 몰아치던 황사도 말끔히 가라앉았다. 그 영향 때문일까, 새털구름 몇 장을 밀고 가는 하늘은 돌 하나 던지면 쨍그랑 하고 깨질 만큼 푸르렀다.

샘머리공원이라고 쓰인 표석을 마주보며 들어선 공원은 아무리 봐도 자연친화적인 맛이 나지 않았다. 잡힐 듯한 정부종합 청사나 굵직굵직한 빌딩군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종일 시끌벅적한 차량의 소음이 들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을 메운 연초록 나무 위에는 새의 모형들을 실물처럼 만들어 올려놓았다. 관심 없이 보는 사람이라면 한 눈에 속기 딱 알맞다.

 

▲ 수령이 몇 백년인 느티나무가 샘머리공원을 지켜주고 있다. 초록의 나뭇가지 사이에서 언뜻 비치는 것이 모형물로 만든 황새다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나 역시 샘머리공원 표지석 위에 올려놓은 까치 한 쌍에 속아 넘어간 걸 보면 처음 이 공원에 들른 사람들은 거의가 속게 마련이다. 나만 속은 게 아니다. 카메라를 멘 청년 몇 도 잎사귀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다람쥐를 보고 폭 속았는지 나중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더구나 화르락 불타오르는 꽃들이 샘머리공원을 한층 더 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며칠 전 공원을 수놓았던 꽃들은 흔적 없고 새로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이 릴레이를 벌이고 있다. 철쭉과 영산홍도 불이 붙었다. 꽃잔디와 민들레, 제비꽃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다.

통나무로 만든 짐승들도 풀밭위에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다. 모두 평화로운 광경이다. 그러나 한껏 봄날을 즐기는 나무와 꽃들과는 달리 한낮의 공원엔 놀이객 하나 없고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직장인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인라인 스케이트장도 텅 비어있다. 오목하게 파인 철판 위를 오르내리며 스케이트를 타는 바람처럼 공원엔 할 일없이 부는 바람만이 순례를 하고 있다.

 

▲ 공원의 화단을 환하게 수놓은 철쭉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긴 바다 파도를 따르다
훌쩍 하늘로 솟던 새처럼
그렇게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송림 우거진 산사와
물보라치는 바다 위를
길 잃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성였습니다

쑥 냄새 흐르는
긴 쉬임의 골짝
솔가지사이로 비추는
석양처럼
그렇게 몸을 사뤄야
할 줄을 알면서도

피멍이 든 가슴을 부여안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그렇게 어이없이
껄껄 웃었습니다.

(정병오 시인의 '순례하는 바람' 전문)


 

▲ 통나무로 만든 동물들이 햇살아래 어슬렁거리고 있다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그러나 이 공원을 지켜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느티나무 고목이다. 공원의 한쪽을 꽉 채운 느티나무는 울퉁불퉁한 밑동에서 늙은 나뭇가지들이 새끼를 치고 나왔을 정도로 그 수령이 자그마치 몇 백 년이 된다. 이 공원만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둔산시가지, 더 나아가 대전까지 지켜주는 셈이다.

그 느티나무 위에 황새 한 마리가 하얀 옷을 펄럭이는가 싶어 자세히 보았더니 아니다. 이것도 완전 모형물이다.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새에 속아 풀풀 웃음을 날리며 걷는데 저 멀리서 문학비 하나가 점잖게 눈에 들어왔다. 앞면이 넘치도록 새겨 놓은 글이 소설가 권선근이 쓴 <허선생>의 한 부분이다.

 

▲ 소설가 권선근의 소설 <허선생>이 새겨진 문학비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해가 서쪽 산마루에 거의 닿을 무렵 나는 허선생과 문식이가 사는 괴목골을 향해 교문을 나섰다. 바람이 씽씽 전선을 울리며 스쳐간다. 시냇물이 감돌고 있는 산비탈을 막 접어들다 우리들은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딱 멈추었다. 그 어린 것이 추단하기에는 너무나 과중한 나뭇짐을 진 문식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문식이도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었다. -중략- "

왜 하필 공원과 하등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고리타분한 소설 <허선생>일까. 뒷면을 보았더니 짤막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읽어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소설가 권선근은 대전 사람이며 한평생 요지경같은 세상에서 "허선생" 같이 살다간 의연한 선비라 그가 쓴 이 소설을 문학비에 새겨 넣게 되었다는 이유였다.

허선생은 바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아마 허선생은 권선근 자신인지도 모른다. 정권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교편과 펜을 놓고 결국에는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한 선비, 하지만 대전 문단에서조차 생소한 그의 공적 때문에 더 신선한 인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 정오의 한낮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몇 발짝 돌아봐도 샘머리공원은 볼 것이 없이 평범하다.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근처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점심 후에 운동 삼아 공원을 한 바퀴 돌거나 노곤함이 밀려오면 잠시 와서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으면 잊고 지낼 것들이 있다. 사시사철, 밤이나 낮이나 화단 한 쪽 귀퉁이에서 서서 공원의 배경이 되어주는 대리석 작품들이다. 요모조모 훑어봐도 우리네 군상을 닮았다. 아래로는 만발한 꽃들의 향기에 묻히고 위로는 푸른 하늘을 감싸면서 즐거운 삶을 엮어가고 있다. 그토록 단단한 대리석을 어떻게 생동감 넘치는 작품으로 빚어 놓았을까.

대리석을 찰흙처럼 주물러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킬 때까지는 석공의 청정한 마음도 한몫했을 것이다. 망치로 내려친 정이 대리석을 파고들며 파편을 튀길 때는 주변의 나무들도 조용히 숨죽였을 것이다. 잎사귀를 스치는 바람도 숨을 죽이고 살며시 석공을 비켜갔을 것이다. 그렇게 수도하듯 청정한 마음으로 빚은 대리석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석공의 마음을 닮은 듯 청정해진다.

 

 
▲ 고공에서의 묘기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나른한 봄 햇살을 쬐며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이 천하태평이다, 근심하나 없다. 사내인지 여자인지 모를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의 일은 미련 없다는 듯 봄날의 낮잠을 즐기고 있다.

나도 저런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딸린 식솔들 걱정하랴, 건강 걱정하랴. 먹고 살일 걱정하랴, 걱정은 태산같이 넘치는데 잠든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순간 부럽기도 하고 성질이 나기도 한다. 원래부터 신은 인간에게 대조적인 삶을 내려주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힘줄이 끊기도록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데 저 사람은 저 곳에서 천하태평 낮잠을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고공에서 거꾸로 손을 맞잡은 두 남녀가 꼭 기계체조를 선보이는 것 같다. 배를 깐 여자가 고개를 바싹 들고 남자의 손을 잡고 뒤로 휙 넘기는 모습에 스릴마저 느낀다. 남자는 뒤로 넘어가면 탄력 있는 발끝으로 사뿐하게 설 것이다. 뒤로 집어 던져도 넘어지지 않는 묘기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배워야 할 지혜다. 한 번의 시련으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에 이 묘기가 더 가슴깊이 와 닿는지도 모른다.

 

 

▲ 놀고 있는 엄마와 아기 ⓒ2006 유진택
ⓒ2006 유진택
엄마와 아기가 풀밭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광경이다. 방금 엄마의 젖무덤을 빠져 나온 아기는 무엇에 의지한 채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옹알거릴 때마다 꽃향기가 아기의 몸을 에워싼다. 그것을 바라보는 엄마의 그윽한 눈매에도 웃음이 돌고 아기의 얼굴에는 방긋 미소가 흐른다. 바쁜 일도 미뤄두고 잠시 아기와 놀아주는 엄마의 일상에 따스한 햇살 같은 행복감이 넘쳐난다.

보이는 대상물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금 바라보는 이 대리석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불만 있는 눈으로 보면 대상물이 즐겁거나 평화롭게 보일 리 만무하다. 공원의 한편 화단에 서있는 대리석 작품들은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비록 한적한 공원엔 바람만이 순례하지만 대리석 작품들을 보며 요모조모 인생의 모습을 반추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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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5-13 0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