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낯선 곳은 언제나 모험의 대상

피나얀 2006. 5. 28. 19:41

 


중국 연길을 가기 위하여 어느 날 인천항을 떠나는 페리를 타고 파도마저 고요한

서해바다를 가르며 중국 대련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중국으로 가는 페리에 오르기전 내 손에 든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였다.

 

연암을 포함하여 250명에 이르는 건륭제 고희 축하 특별 사행단 일행은 1780년 6월24일 압록강을 건넌 후 8월 1일 북경에 도착하고, 다시 닷새 후 북경을 출발해 무박 5일 만에 열하에 이른다.

 

이들은 10일간 열하에 머문 후 다시 10월 말에야 서울에 도착하는데 그들이 이동한 거리는 압록강에서 연경까지가 약 2300여 리. 연경에서 열하까지 약 700리. 도합 육로 3000리를 걸어 가는 먼 거리였던 것이다.

 

이런 내용의 열하일기를 중국 현지에서 읽어 본다는 것은 색다른 느낌일 것 같아서 였다. 서해바다를 건너는 이 여행은 그 동안 30여 회의 중국 방문 중 유일하게 배를 이용하는 여행이었다.

 

내가 탓던 페리의 이곳 저곳에 서넛씩모여 이야기 하거나 쉬는 모습을 보니 상당수의 승객은 이 항로를 오래전부터 오가며 소규모 무역을 하는 보따리 상인들 같았다.

대련역에 도착해 보니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듯이 대련역 도착했을때는 심양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표가 이미 매진되어 버린 상태였다. 어찌어찌하여 암표를 구하였는데 경좌차(硬座車=yingzuoch)표 였다.

 

나의 객실은 입석 손님이 입추의여지 없이 가득하였고, 열차의 통로를 매워 버린 승객들의 보따리로 인하여 걸어 다닐 수도 꼼짝하기도 불편할 정도였다. 더욱이 샹차이와 미나리 내음, 이름모를 차 내음과 인민들의 땀 내음이 열차에 가득했다.

 

승객들의 이야기 소리가 너무 커서 열기 가득한 열차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 많은 중국 인민들을 싣고 열차가 무사히 목적지에는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 였다.

 


동북 3성 중 가장 많은 조선족이 밀집해 있고, 생활 풍습이 우리와 닮아 있고 거리에 생기 가득한 연길역에 도착하여 거리의 간판들을 보면 한국의 어느 중소도시에 온듯한 착각이 들곤한다.

 

연길에 사는 동포 상당수의 억양은 북한말과 경상도 말씨를 혼용하여 사용하는데

낯설긴 하지만 이 역시 생기있고 씩씩하고 활발하다. 연길에 도착하던 날 저녁엔 베이킹덕(북경 오리) 전문요리집에 가서 오리고기를 통째로 먹었다.

 

북경에 가면 꼭 북경오리전문점에 가곤 하였는데, 이곳 연길에서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오리요리 전문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우선 테이블 가득히 오리 내장을 이용해 만든 온갖 밑반찬이 깔렸다.

 

60도가 넘는 죽엽청주에 나의 혀가 반응할 즈음 마치 천정에 닿을 듯 하얗고 높은 모자를 눌러 쓴 요리사가 누렇게 익은 오리 한 마리를 손수레에 싣고 서서히 나의 테이블로 걸어 왔다.

 

요리사는 능숙한 솜씨로 예리한 칼을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오리 껍질과 살점을 동시에 도려냈다.

 

그 조각들을 지름이 15센치쯤 되어 보이는 얇은 찹쌀만두피에 소스를 바른 후 잘게 썬 파와 오이, 당근 등을 말아서 한 입에 넣으면 입에서 씹을 시간도 없이 스르르 녹아 버리는 듯 하였다.

 

내가 그동안 백두산에 갈 때는 거의 대부분 연길에서 출발하였다. 연길에서 해란강, 이두백하를 거쳐 백두산을 향해 승용차로 달리면 반나절 후에 장백산 공원 입구에 도착할수 있다.

 

장백산 공원 입구에서 부터는 백두산에 오르는 좁고 험한 길에 잘 훈련된 운전사의 지프를 빌려타고 해발 2700미터쯤 올라간 후 50미터 정도 힘들게 걸어서 백두산 천지에 오르게 된다.

 

그곳부터는 해발이 높은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산소가 희박하여 숨이 가뻐지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길은 용암이 잘게 부셔진 부석층이라서 멀리서 보면 하얗게 보이는데, 정상에 오를 때 모래사장에 오르는듯 미끈거려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다.

 


1864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된 김정호 선생은 이 백두산을 7번이나 올랐다던가.

김정호 선생과 내가 오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백두산에 오른건 약 10번 정도다.

 

그런데 그 중 3번 정도만 맑은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설령 맑게 개인 천지의 모습을 본다고 해도 어디선가 금새 구름이 몰려오고 안개가 끼어 버려 천지의 모습을 오래 본다는것은 언제나 잠깐 이었다.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모습을 넋놓고 보고 난후에는 하산하여 장백폭포와 유황온천을 즐길 수 있다. 장백폭포는 68미터의 높이로 가파른 지형의 영향으로 암벽을 때리며 흘러 내리는데 그 물살이 너무도 빨라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하늘을 오르는 다리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물은 송화강으로 유입되는데 폭포 근처에는 유항 냄새가 가득하고, 그 온천물에 계란과 옥수수 등을 쩌서 웰빙식품이라고 판매하는 상인들이 시골 장날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이 여행을 마무리 할 즈음 나의 예정에도 없이 연길 북경간 침대 열차를 타게 되었다.오전에 연길 중앙역을 출발하여 그로부터 꼬박 24시간 후에 북경 중앙역에 도착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연길과 북경간처럼 하루거리의 열차구간은 짧은 구간 중 하나일 뿐이다.홍콩을 출발하여 연길까지는 꼬박 5일이 걸리기도 하고, 15일 이상 달리는 구간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탄 열차는 마치 유럽열차의 쿠세트처럼 3층 구조에 6명이 한방에 자도록 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경와차(硬臥車=yingwoch)라 한다. 탈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열차의 통로마다 경찰관들이 섬세하게 검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차는 압록강 건너 북한의 온성이 보이는 도문을 출발한 기차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4시간 동안 달려가기 위하여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한 승객들은 해바라기씨 호박씨등을 종일 까먹으며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거나, 포커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먹을거 하나 챙기지 않은 상태로 가방하나 달랑 들고 여행중이니 24시간 동안 쫄쫄 굶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가끔 어느 낯선 역에 정차하면 열차 밖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이 이름 모를 먹거리들을 팔았다. 열차내에서도 가끔 먹거리를 파는 트롤리가 지나가기도 했는데 사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3층에 있는 내 침대에 눈을 붙였다 뜨면 내 건너편에 자리한 요염한 중국 여인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였지만 그녀는 영어를 할수 없었고, 나는 중국어를 말하지 못하니 그녀와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열차의 차장 너머로 끝없는 벌판에는 황금색으로 물든 밀밭, 또 밀밭, 그리고 또 밀밭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달려도 끝이 안보이는 저 황금 벌판이 한때는 우리 민족의 땅 이었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곳엔 밀밭뿐만 아니고 석유도 생산되는 귀한 벌판이었다.

 

이렇게 하루를 꼬박 달려 북경에 도착한 후 호텔방에서 잠을 청하는데 내 몸은 아직도 밤새 덜컹덜컹 움직이면서 연길 북경한 열차에서 아직 내리지 않은듯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호텔 근처 자금성 높은 담을 돌아 산책하고 있는데 댄스 음악을 틀고 서로 짝지어 춤추는 중년 남녀, 쿵후, 체조하는 사람들, 딱딱한 목재 의자를 길가에 주욱 늘어 놓고 버젓이 영업을 하는 거리의 이발사들이 보였다.

 

거리의 이발사들이 죽 늘어선 아침 거리를 산책하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내용이 떠올랐다. '내 평생에 괴이한 구경은 열하에 있을 때만 한 것이 없었으나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많고, 문자로써는 능히 형용할 수 없어서 모두 빼놓고 기록하지 못하니 가히 한스러운 일이다.'

 

누군가 말했다.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은 언제나 모험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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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머니투데이 2006-05-28 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