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YARN™♡ 【TODAY 스크랩】

【TODAY 스크랩】중년 가장으로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

피나얀 2006. 5. 28. 19:54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갑에는 만 원짜리 한 장이 들어있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축의금 준비를 위해 현금출금기로 갔다. 그런데 현금이 나오질 않는다. 카드에 문제가 있는가 확인해 보았더니 카드고장이 아니라 잔고가 없었다. 마이너스통장의 잔고까지 말라버렸으니 딱 그만큼 빚지고 사는 셈이다. 할 수 없이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지난 2월 중순에 제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제주에서 몇 년을 살면서 마이너스 통장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렇게 마이너스잔고까지 말라버린 적은 없었다. 서울에서는 제주에서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출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가계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출항목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교육비다. 좀 특별한(?) 부모들처럼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생각도 했었지만 아이들이 도저히 그냥은 학교공부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고 나중에 부모를 원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니 두 손 들었다.

이 땅의 교육은 죽었다.

제도교육권에서는 해법이라고 내어놓지만 그때마다 사교육만 조장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물론 입안하는 이들만 탓하고 싶진 않다. 자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욕심이 함께 개입되어있으니까.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대략 왕복 80km, 불편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피곤할 때에는 복잡한 계산을 한다. 얼마 아끼자고 이렇게 다녀야 하나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결국 현실 앞에서 피곤함을 감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렇게 아끼고 살았는데 서울생활 넉 달이 되기도 전에 잔고가 말랐다니 너무 허망했다. 이미 내 집을 갖겠다는 꿈을 접은 지 오래고, 노년을 위한 준비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그림의 떡이다. 참, 무능한 가장이구나 자책감이 든다.

아이들 셋을 이 땅에서 교육 시킨다는 것이 이렇게 큰 부담이니 누군가 애국한다고 아이를 더 낳는다고 하면 생각 잘 해보라며 손 사래질을 한다. 이 땅에서는 아이들 키우는 것이 지옥 같다고, 아이들은 숨 막히는 교육환경 때문에 지옥 같고 부모들은 돈 벌어 사교육비 대느라 지옥 같은데 하나도 많지 않느냐고 한다. 서울 생활 석 달이 되기 전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도 시골에서 살 때에는 경쟁이 느슨하다 보니 아이들도 학원에 보내는 정도면 충분했고, 학원비도 농촌 현실 등을 생각해서 책정되었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 '주시면 늦둥이 하나 더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서울생활을 하면서 이전보다 수입은 더 늘었는데도 생활은 나아진 것이 없다.

그 이전보다 사치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문화비와 외식비도 줄고, 아내와 나는 용돈이라는 것과는 아예 담쌓고 사는데도 미래를 위한 준비는 고사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꽉꽉 채워가면서 살아가니 서울에 잘못 왔구나, 후회도 든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경쟁에 시달리고, 나는 나대로 일에 치이면서 살아가니 불편해도 넉넉하던 시골생활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하는 오기를 가지고 '좋은 날도 오겠지' 노래하면서 서울생활에서 희망찾기를 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복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몇억이 필요하다고들 하고 40 중반에는 몇억 정도는 적립되어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적립은커녕 마이너스인생이니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그냥 아이들 건강하게 자라주고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여겼던 지난날들이 부질없는 시간이 아니었는가, 아무리 행복이 주관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너무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내 삶의 지표가 흔들린다.

중년의 가장으로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푸념하면서 살 수 없는 이유는 훨씬 더 어려운 상황들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나의 동년배들, 중년의 가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경쟁의 대열에서 선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우등생들, 몇백 아니 몇천은 우습게 생각되는 이들 말고 고단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서울의 가장들, 모두 파이팅!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자연과 벗하여 살아가다 자연을 닮은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 1, 2>, <희망 우체통>, <달팽이걸음으로 제주를 보다>등의 책을 썼으며 작은 것, 못생긴 것, 느린 것, 단순한 것, 낮은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

 

 

 

 

 

 

 

 

 

 


뉴스게릴라들의 뉴스연대 -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출처-[오마이뉴스 2006-05-28 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