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YARN™♡ 【이성(연애)】

브라보! 엄마의 외출

피나얀 2006. 6. 13. 21:15

 

출처-[한겨레21 2006-06-13 08:06]  

 

 


남편과 자식에 얽매였던 일상을 깨고 현관문을 나서 인생을 찾는 어머니들…뭐든 배우고 문화를 즐기는 것이 유행, ‘X세대 노인’의 출현을 예고한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을 먼저 찾았다. 밥을 올려놓고 국거리를 다듬고 밥상을 차렸다. 부엌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애들 방으로 어머니는 집안을 맴돌았다. 그렇게 30여 년. 자식은 결혼해 독립했고 남편은 퇴직한 지금 50대에서 60대로, 60대에서 70대로 넘어가는 어머니들의 동선이 달라지고 있다.

 

해방을 맞은 독립군의 심정

 

가상인물 김점숙씨의 뒤늦은 독립선언은 한국 여성 노인들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어머니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대로 간다. 머리를 매만지고 곱게 화장을 한다.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바쁘게 현관문을 빠져나간다. 한 손에는 노인복지관 수업 교재를, 다른 손에는 영화표를 들고.

 

‘쾅’ 현관문이 닫히면 어머니의 외출은 시작된다.

“고전무용도 하고 합창단, 산악회까지 하느라 아주 바빠 죽겠어. 그래도 이렇게 다니니까 생기가 있어서 좋아. 사는 게 이렇게 재밌다는 걸 애들 키울 때는 몰랐어. 시간 날 때마다 빛깔 좋은 옷도 사러 다녀. 늙었다는 소리 안 들으려면 신경 써야지. 나도 멋지다는 소리 듣고 싶어.”

 

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에 분홍빛 화장을 하고 노인복지관에서 고전무용을 배우는 박춘자(70)씨는 사는 얘기를 하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박씨가 현관문을 나서기 시작한 것은 60대 중반이던 5년 전. 그전까지는 여느 대한민국 주부와 다름없이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수십 년을 보냈다. 지금 박씨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

 

안영옥(가명·58)씨의 일주일은 사회 저명인사의 일정 못지않다. 월요일에는 병원에 들러 합창 연습을 한다. 화요일에는 하루 종일 포토숍 등 디지털 아트 강의를 듣는다. 수요일에는 연필스케치 강좌를 듣고, 목요일에는 동네 노인정에서 장구와 판소리를 배운다.

 

금요일 오전에는 민속박물관에서 한복 바느질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포토숍 심층강의를 듣는다. 친구들과 함께 종종 여행도 떠난다. 틈날 때마다 혼자 영화관 찾는 일도 빠뜨리지 않는다. 최근 열흘 동안 본 영화만 해도 다섯 편이 넘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안씨의 일상은 1년 전부터 시작됐다. 집에만 갇혀 살던 안씨는 인생을 되찾고자 가족에게 독립선언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 애들 다 결혼시키고 아직 건강한 지금이 얼마 남지 않은 황금 같은 시간이라고. 안씨의 ‘독립투쟁’에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도 결국 항복했다. “요즘에는 아침에 남편보다 일찍 가방을 메고 나가요. 사는 게 신나요.”

 

평생 남편의 그늘에서 살던 최혜순(가명·66)씨의 변신은 2년 전 가을에 찾아왔다.

 

남편이 그렇게 싫어하는 화장을 하고 꽃무늬 옷을 입고 최씨는 산으로 향했다. 등산에 ‘꽂힌’ 최씨는 매일 약수터에 가서 물을 떠오고 이틀에 한 번씩은 친구들과 차를 타고 먼 곳의 산을 찾는다. 친구들이 아줌마 일색은 아니다. 등산 친구 중에는 동네 아저씨도 있다. 친구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최씨에게는 즐거운 인생이 찾아왔다. 자식 얘기, 남편 얘기가 아닌 내 얘기, 친구 얘기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니 말이다.

 

어머니들은 왜 현관문을 나서는 걸까. 이금룡 상명대 교수(가족복지학)는 이에 대해 “이들은 한평생 가족에게 얽매여 사는 전통적인 여성이었다”며 “자식을 다 떠나보내고 다시 부부만 남는 ‘빈 둥지(empty nest) 단계’에 접어든 뒤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자의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아니었다. 오로지 어머니의 역할만 주어진 가족 구성원으로 살다가 노년기를 맞이한 이들이 이제야 제대하는 군인의 심정으로, 해방을 맞은 독립군의 심정으로 새로운 ‘나’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교수는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와 여가생활에 관심이 높아지고 노래방이나 카페, 찜질방 등 노년기 여성들을 수용할 만한 시설이 많아지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라고 해석했다.

 

홀로 남은 아버지, 불협화음은 계속된다

 

어머니가 외출하면 아버지는 홀로 집에 남는다. ‘아내가 곰국을 끓이면 장기 외출의 신호다’라는 말은 이미 아버지들 사이에 유행어가 됐다. 아내와 함께 외출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60대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와 60대가 돼서야 ‘집을 나서는’ 어머니 사이에는 깊고 두꺼운 벽이 자리잡고 있다. 여가 시간을 같이 보내본 적이 없는 부부가 60대에 접어들어 함께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렵다.

 

3년 전 사업을 그만둔 김진모(67)씨. 63살인 김씨의 아내는 매일 산으로, 바다로, 노인복지관으로 바쁘게 돌아다닌다. “나는 조용히 낚시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내는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노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둘이 같이 할 만한 취미생활은 없지요. 또 아내가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을 재미없어하기도 하고….”

 

김씨는 사회활동을 접으면서 인간관계도 좁아졌다. 수십 년 동안 김씨의 인간관계는 명함을 들고 만났던 사람들 위주였다. 이제는 친구를 만나서 놀고 싶어도 고교 동창 외에는 막상 만날 만한 친구가 없다. 그러나 아내는 지역 기반의 인간관계를 구축해놓은 덕에 언제든 만나서 놀 수 있는 동네 친구들과의 모임이 많다. 김씨와 그의 아내는 이렇듯 정반대의 삶의 궤도를 지나고 있다.

 

실버 카운슬러 고광애(69)씨는 “자식들 내보내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노년 여성들이 뒤늦게 가정으로 돌아온 남편을 반가워할 리가 없다”며 “동시에 편안하게 쉬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남성들에게 가정은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 낯선 곳”이라고 설명했다. 또 “여성들은 노년기에 들면서 변화를 즐기고 도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남성들은 보수적이고 변화 적응력도 떨어져 불협화음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X세대 노인’의 출현을 2010년으로 보고 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지금의 50대가 60대가 되는 2010년, 노인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상이다. X세대 노인은 자녀의 부양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추구하는 ‘통크족’(TONK·Two only No Kids)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기존 노인 세대와는 달리 감각적이고 적극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소비를 추구한다.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이러한 X세대 노인의 특징을 지금 외출에 열심인 60대 안팎의 어머니들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5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의 어머니들은 1930~50년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났다. 베이비붐 전 세대로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아끼고 또 아껴서 남편을 산업역군으로 자녀를 대기업 사원으로 키워냈다.

 

이들은 X세대 노인과는 다른 성장 과정을 지냈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독립적으로 인생을 즐기려는 모습이 결과적으로는 X세대 노인의 특징을 갖추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이 교수는 외출에 나선 어머니들을 ‘돌격대장’이라고 칭한다. 동시대를 살아온 남성들이나 다른 여성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도전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미래 노인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개척자, ‘X세대 실버 프런티어’라고나 할까.

 

실버산업을 움직이는 노년 여성

 

날로 확산되는 X세대 노인의 라이프 스타일은 실버산업에서 가장 먼저 감지된다. 현재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여가생활의 모습이 앞으로 점점 더 구체적이고 일반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실버산업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해 7월 ‘새로운 소비자집단 등장과 기업의 대응’ 보고서에서 “젊은 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자기중심적 소비 패턴이 노년층까지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자신만의 인생을 추구하는 노인층이 향후 비중 있는 소비자 집단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광고회사 제일기획이 40대 중반부터 60대까지의 생활과 소비 양식을 분석해 펴낸 ‘기성세대 탐구보고서- 와인세대를 말한다’에서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마케팅 키워드로 ‘여성’을 꼽고 있다. 조사에 응한 240명 중 79.5%가 ‘상품을 구입하거나 브랜드를 선택하는 것은 남성보다 여성’이라고 응답했다.

 

여성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화장품의 경우 노년 여성에게 좋다고 알려진 한방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주름 예방과 개선 제품에 대한 기대도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보다 실버산업이 발달한 일본을 살펴보면 여성들이 주도하는 여가와 관광산업의 비율이 다른 산업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 교수는 “아내라는 틀을 깨고 취미와 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와 관련된 지출도 아끼지 않는 60대 여성들이 현재 실버산업의 주요 공략층”이라며 “국내에도 곧 이들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산업과 여가산업, 정보화 교육산업 등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발맞춰 노년 여성들을 보는 사회적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늘그막에 바람났다’고 손가락질했을 법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노후를 꾸려가는 여성에게는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자녀도 자신에게 의존하려는 어머니보다 ‘독립 실버’들에게 더 큰 존경을 보낸다.

 

또 예전에는 춤바람처럼 일탈에 가까운 외출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뭐든 배우고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이 노년 여성들 사이의 유행이며 화두다.

컴퓨터와 한자 배우는 데 푹 빠져 있다는 김경애(65)씨는 이렇게 말한다. “윗세대만 해도 사람들 시선 때문에 놀 수도, 놀 데도 없어서 몰래 무도장 같은 데 가고 그랬지.

 

지금은 그렇지 않아. 뭐든 배우면서 놀고 싶어. 배우는 게 그렇게 재밌어. 욕심이 생겨. 따라잡기 어렵지만 그래도 남는 게 있는 것 같아. 건강만 따라준다면 꾸준히 배우고 즐기면서 나를 위해 살고 싶어.”


“사회 곳곳에 박수를 쳐주자”

실버 카운슬러 고광애씨가 말하는 즐거운 노년 보내기
 

노인들의 눈높이에서 쓴 책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바다출판사 펴냄)의 저자이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노인 상담코너를 맡고 있는 실버 카운슬러 고광애(69)씨. 평생 아들딸 키우며 주부로 살아온 고씨는 지금도 90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70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래도 50대부터 틈틈이 쓴 원고를 묶어 책으로도 내고 역시 50대부터 시작한 죽음학에 관한 공부를 지금까지도 꾸준히 하고 있다. 또래 노인들의 고민도 상담해주며 알찬 노후를 보내고 있는 고씨는 영화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의 임상수 감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고씨에게 날아오는 수많은 상담 사연 중 가장 많은 고민은 ‘돈’이다. 경제력이 노후의 질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도 경제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고생하면서 살아와서 돈을 아끼느라 전전긍긍하는 노인들도 많다.

 

같은 노인으로서 이런 노인들을 보면 안타깝다. 노인마다 경제력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노후를 보내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그래도 여유 있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이 제일 보기 좋다.”

 

고씨는 “70대가 가까워지면 고부갈등까지 다 졸업해 자녀와 더 멀어지지만, 동시에 자신과는 더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고씨가 노년 여성들을 위해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취미생활에 적극적인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여행도 공부도 다 좋지만 우리 노인들이 사회 곳곳에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교양도 쌓고 사회적으로 더 좋은 기운이 퍼질 수 있도록 자원봉사 활동이나 전시회, 음악회 등에서 박수를 치는 것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