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작은 유토피아’ 소쇄원·명옥헌·식영정

피나얀 2006. 7. 13. 00:39

 

출처-[경향신문 2006-07-12 11:51]

 

고서에서 담양으로 향하는 887번 국도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처럼 원근법적으로 휙휙 지나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드문드문 나타나는 수많은 정자와 원림의 이름들도 가로수와 함께 지나간다.

 

소쇄원, 명옥헌, 식영정, 면앙정, 환벽당, 송강정…. 서른개는 넘을 것이라는 담양 지역의 정자와 원림들은 언제 목이 떨어질지, 삼족이 멸할지 모르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자발적으로, 혹은 타의에 의해 피해온 ‘유배의 집’이었다.

 

당쟁에서 밀려난 16세기와 17세기 사림들이 무리를 이루어 은거하던 일종의 동아리 방 같은 작은 천국이었던 셈이다. ‘자전거 여행’의 저자 김훈이 이곳들을 향해 ‘지옥 속의 낙원’이라 한 것은 바로 이런 데서 연유하는 듯 싶다.

자칫하면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살얼음판 같은 당쟁의 비극 속에서 자연에 묻힌 선비들은 이곳에서 애써 정계를 잊고서, 혹은 임금이 다시 성은을 내려줄 그날을 기다리며 지냈다.

 

담양 소쇄원


#소쇄원

옅은 비 뿌리는 장마철의 이른 아침,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소쇄원은 김이 살살 새어나오는 한증막 같은 아침안개를 품은 별천지였다. 멀리서부터 들리는 콸콸 쏟아지는 폭포 같은 물소리는 우산 든 더딘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게 한다. 내부를 외부로부터 가리는 것이 담장이라면, 소쇄원의 담장은 그 역할을 거부한다.

 

소쇄원의 담장은 외부와 내부를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연출하는 아름다운 무대장치일 뿐이었다. 1,400평이라는 소쇄원에서 담장은 계곡을 따라 시작되었다가 물이 지나가는 부분에서는 잠시 끊겨 물과 사람이 지나갈 길을 내어주기도 하고, 공간을 구분해야 할 곳에서는 문을 들이기도 한다.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다가 기묘사화를 맞아 스승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양산보(1502~1557)가 제주 양씨의 고장에 지은 이곳에는 송강 정철을 비롯해 송순,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기대승 등 당대의 선비들이 찾아왔다.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대봉대’는 손님을 맞는 정자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광풍각과 마주보고 있다.

 

이름처럼 바람과 빛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사방이 확 트인 정자 광풍각은 오래 기거하는 손님들을 위한 곳이었다. 여러번 소쇄원을 다녀온 사진기자는 이번처럼 광풍각 앞의 계곡에 폭포처럼 물이 콸콸 흐른 적이 없었다며 신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광풍각 뒤편 조금 높은 곳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제월당이 서있다. 담장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알려진 ‘소쇄처사 양공지려’라는 옥호가 크게 새겨져있다.

집주인의 공간이었던 이곳 제월당에서는 정말 달빛만이 교교히 스며들 것만 같이 조용하다. 물소리는 이미 담장을 사이에 두고 들리지 않는다. 제월당에서 대숲쪽으로 빙 돌아 내려오면 바로 입구인 대봉대가 된다. 대봉대 옆 연못에는 대나무를 반 갈라 만든 낙수통이 멋스럽게 드리워 있다.

 

그 자리에서 다시 광풍각과 제월당을 올려다 보려는데, 눈앞에 보슬비를 머금어 찬란하게 빛나는 거미집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혹여 조선의 선비들은 잘못하면 꼼짝없이 걸려들어 오도가도 못하는 찬란한 거미집처럼 빛나는 중앙정계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던 것은 아닌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을 오갔던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도 어느 보슬비 내리는 날 아침, 소쇄원을 산책하다가 문득 아름답게 빛나는 거미집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지 궁금해진다.

#명옥헌

 

담양 명옥헌

소쇄원보다 100년쯤 후에 지어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에 위치한 명옥헌은 나주 오씨 오명중(1619~1655)이 꾸민 곳으로 배롱나무 고목들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8월이면 붉은 배롱나무 꽃들이 진분홍 꽃대궐을 차리는 이곳 역시 작은 유토피아를 만들려 했던 선비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명옥헌 바로 앞에 있는 집에 사는 할머니는 “명옥헌 앞의 커다란 연못 말고, 저 위에도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옆의 석축에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알려줬다. 과연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란 희미한 글씨가 있었다. 소쇄원의 담장 글씨와 명옥헌의 글씨 모두를 쓴 우암 송시열이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서인의 거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식영정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발자취가 특히 짙게 드리운 식영정 옆에는 가사문학관이 위치해있다. 명종 15년(1560), 근처에 서하당을 세웠던 김성원(1525~1597)이 장인이자 스승이었던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세웠다.

 

 이곳은 특히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으로 유명한데, 식영정 옆에는 성산별곡을 새긴 시비가 서 있다. 식영정의 뒤편에 조성된 솔숲은 경주 소나무의 사진가 배병우의 작품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빽빽하고 아름다우며, 식영정에서 내려다보는 광주호의 물도 가슴을 탁 틔운다.

 

성산별곡에서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라고 읊은 정철의 마음을 알 것도 같은 풍경이다.

▶소쇄원을 위한 즉흥시

하서당 김인후(1510~1560)

대숲 너머 부는 바람은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의 밝은 달은 마음 비추네



깊은 숲은 상쾌한 기운을 전하고

엷은 그늘 흩날려라 치솟는 아지랑이 기운



술이 익어 살며시 취기가 돌고

시를 지어 흥얼 노래 자주 나오네



한밤중에 들려오는 처량한 울음

피눈물 자아내는 소쩍새 아닌가

 

▲여행길잡이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동광주 IC-고서(826번 지방도로)-고서사거리에서 우회전(887번 지방도로)-식영정-소쇄원

호남고속도로-동광주 IC-고서(826번 지방도로)-후산마을서 우회전-명옥헌

▶먹거리

대나무의 고장답게 대나무 통밥과 떡갈비가 맛있다. 한상근 대통밥집(061-383-5888)은 대통밥과 함께 갓 따온 죽순에 갖은 양념을 한 죽순회를 잘하는데, 6월부터 죽순회가 먹을 만하다. 대통밥은 1인분에 8,000원, 죽순회는 1만5천원이다. 담양 떡갈비는 죽물박물관 근처 신식당(061-382-9901)이 유명하다.

여행상품 우리테마투어, 하나강산, 고인돌 답사 등 여행사에서 담양 소쇄원, 거제 해금강과 외도, 보성 녹차밭 등을 다녀오는 상품을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