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선비의 본고장·남도답사 1번지 ‘담양·강진’

피나얀 2006. 7. 13. 00:37

 

출처-[경향신문 2006-07-12 11:30]

 

 


휴가는 잡았다. 해수욕장? 사람들로 넘쳐날 게 뻔하다. 유명계곡? 돗자리 깔고 앉기도 힘들 텐데…. 30대 노총각 회사원 ㄱ씨는 ‘바캉스’가 겁난다. 그렇다고 안갈 수야 없지. 무더위를 피해 들른 서점에서 그는 번개같이 ‘바캉스 묘책’을 떠올렸다.

 

‘선비(눌와)’, ‘조선왕조 독살사건(다산초당)’,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 인문학 코너에서 만난 책들이 그 해답이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여름휴가를 조선의 선비들과 함께 떠나자. 선비들에게서 배우자. 마침, 복잡한 인생 재정비도 필요하다.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다가 유배를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스스로 정치의 칼바람을 피해 은둔하면서 지냈던 남도의 정자와 원림, 초당들을 찾아다니며 조선의 선비들에게 삶의 혜안을 배우리라 결심했다.

 

얼핏 책으로 일별했지만 선비들은 그가 평소 생각했던 갓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수염만 쓰다듬었던 꽁생원들만은 아니었다.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자신은 물론 가문의 흥망성쇠가 왔다갔다 했던 ‘살얼음판 줄서기’는 요즘 기업 내의 ‘출세 줄서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우선 ㄱ씨는 올해 휴가를 선비의 본고장이자 남도답사의 1번지라 일컬어지는 담양과 강진으로 가기로 했다. 송강 정철(1536~1593)의 땅인 담양,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배지 강진에서 읽을 책들을 몇권 샀다. 올 여름 남도의 땅에서 이루어질 선비들과의 만남, 그는 벌써부터 기대된다.

 

남도는 ‘정계 패자부활전’에서 승리를 꿈꾸는 조선 선비들의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였다. 소쇄원, 명옥헌, 식영정, 취가정, 송강정, 면앙정, 환벽당, 독수정, 풍암정…. 조선중기를 넘어가면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임금마저도 당쟁의 와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쟁의 최종 판결자였던 임금은 경종 이후에 와서는 정적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조선초기 성종대왕이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하기 시작한 초야의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 대북과 소북,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등으로 자체 분열을 거듭한다. 사화와 반정, 환국이라는 이름의 정계 대개편이 일어나면서 호남지방에는 하나 둘씩 정자가 늘어났고, 원림이 조성되었다.

 

그러니까 이 정자와 원림들은 당쟁이 낳은 ‘서자’이자, 정계에서 떨려난 선비들이 재기를 꿈꾸는 ‘재야 연수원’이었다. 요즘은 미국의 유명대학 무슨무슨 연구소에 들어가지만 말이다.

 

담양 땅은 어디를 가도 송강 정철과 가사문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누이들이 왕족과 결혼하는 바람에 어린시절 궁궐에서 대군과 소꿉친구를 하며 지냈던 정철은 10세때 터진 을사사화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된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던 이곳 담양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난 그는 27세에 과거급제한 이후 당쟁의 와중에서 서너번 탄핵을 받아 낙향과 유배를 거듭한다. 그때마다 그를 품어주던 곳이 바로 담양의 정자와 원림들이었다.

 

강진은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의 땅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유명한 근대 시인 영랑 김윤식의 고향이기도 하다. 특히 다산과 10세 연하인 승려 아암 혜장선사(1772~1811)가 오가던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800m의 산길은 유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당대의 석학이 만나는 ‘철학의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갈 것인가’ 묻는다면? 누군가 ‘디지로그 시대’라고 정의한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해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가자, 남도로.

 

▶선비처럼 여행가방 챙겨보자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정광호 지음, 눌와)은 조선 대표 선비 16인에 대한 입문서다. 만일 송강이나 다산에 대해 쓴 두꺼운 책을 읽기 전에 뭔가 가이드 북처럼 읽고 싶다면 강추. 정철은 ‘고집 속의 풍류인’이란 부제가, 정약용은 ‘소극성으로 감춘 대의’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김시습, 조식, 이확, 윤증, 김만중, 김정희, 흥선대원군 등에 대해서도 서술되어 있다.

 

‘조선왕 독살사건’(이덕일 지음, 다산초당)은 왕에게도 당적을 붙여 피아를 가르기 시작한 조선 중기부터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역사를 ‘독살’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서술했다. 여러권의 흥미로운 역사서를 펴낸 저자의 글솜씨는 조선후기의 당쟁사를 마치 탐정소설처럼 읽게 만든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쓴 편지를 묶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는 ‘큰 선비’였던 다산의 사상과 그의 인물됨을 엿보기에 좋은 책. 두 아들과 역시 흑산도로 귀양가 있던 둘째 형 정약전, 그리고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사대부답게, 인간답게 사는 법, 선비란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했다.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김봉렬 지음, 돌베게)는 한국의 대표적 건축인 서원, 정자, 불교건축의 구성 원리를 건축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측면에서까지 서술한 건축으로 읽는 역사서이자 사상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