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레이디경향 2006-08-10 10:57]
Prologue
마음이 어지러운 날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러 간다. 그런 날은 끝내 잠 한숨 못 자고 어둠이 가장 깊은 시간 길을 나선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들, 너무 늦은 밤 귀가하지 못한 취객, 짙은 어둠은 머릿속의 죄의식을 지우고 두려움을 지운다.
수평선에서 오징어잡이 배들이 켜놓은 불빛이 반짝거린다. 노동이 아닌 잡념으로 지새운 나의 밤들이 떠오른다. 나처럼 일출을 보겠다고 온 사람들이 서성거린다. 그들의 관계, 그들의 이유, 그들의 어제, 그리고 그들의 오늘을 상상해본다.
5시…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태양이 물들이는 바다를 보면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여름에 대한 기대는 종종 더위에 묻혀 무색해진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름이라고 곧장 대답한다. 여름에는 내가 좋아하는 공포영화나 블록버스터 액션영화가 줄줄이 개봉하기도 하고 겨울옷이라면 겨우 하나 살 수 있는 가격으로 몇 벌의 가벼운 여름 옷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름이 좋은 건 휴가 혹은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다른 계절에도 나는 여름을 상상하면서 에메랄드빛 비치에 누워 평화롭게 하염없이 책을 읽거나 땀조차 말라버릴 만큼의 뜨거운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 멀리 멀리 떠나는 꿈을 꾼다.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면 기대도 무럭무럭 자란다. 수영을 배워야지, 비키니를 입으려면 운동을 해야지, 멋진 곳으로 휴가를 가려면 돈을 모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모두 여름 이전에 하고 준비했어야 비로소 여름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여름이 시작되면 후회가 시작되고 나는 불평꾼이 된다. 더워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동향의 아파트로 이사한 뒤로 이 불평은 더 심해졌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찬란하고 뜨거운 햇살이 온 집안을 습격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식욕도 없어진다. 기대와는 달리 여름이 본격적으로 뜨거워지면 다만 지나가길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부산이다 보니 남들은 휴가라고 내려오는 곳이 내가 늘 지내는 곳이다. 하지만 여름이 시작되고 해수욕장이 개장하면 평소 때는 자주 놀러 다니는 해운대 쪽은 멀리 하게 된다. 차가 막히고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정작 여름 바다에 대한 추억은 아주 오래전의 것이 되고 말았다.
작년 여름 친구가 부산으로 놀러왔다. 부산이 처음이라는 그들과 함께 나는 실로 몇 년 만에 여름의 해운대를 찾았다. 백사장을 촘촘히 메운 파라솔,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릴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 여름이면 나는 바다에 놀러가자고 부모님을 졸랐고, 부산의 해수욕장을 한 바퀴 순례했다.
해운대, 광안리, 송정, 다대포, 송도까지. 무럭무럭 자라는 때여서 해마다 수영복을 샀고 신종 물놀이 기구를 새로 구입하기도 했다. 어른이 된 우리는 어릴 때처럼 사람들이 넘쳐나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이국의 바다에서 행복하던 그해 여름
그 물놀이의 기억이 즐거워서 그 여름에는 내처 바다로 휴가를 갔다. 미리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었고 급하게 예약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푹 쉬다 와도 좋지 않을까 했지만 패키지 여행이던 탓에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차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여름 방학동안 두 달 정도 강습을 받은 경험이 있으니 수영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닐 테지만, 그 이후에 수영장을 간 적이 없고 그러는 동안 수영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수영을 배웠으나 하지 못하는 건 결정적으로 겁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한정된 풀 안에서도 그러한 데 바다는 오죽하고 바다 밑은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이 수영을 하지 못해도 스쿠버다이빙은 할 수 있으니 꼭 해보라고 권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해보기로 했으나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숨쉬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이버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고 잘 가르쳐주었고 나는 바다 속으로 무사히 헤엄쳐갔다.
푸껫의 산호섬 바다 속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초보자인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이 그리 깊은 곳도 아닐 것이고. 그러나 나는 아주 즐거웠다. 물고기떼도 아름다웠고, 내 눈으로 들여다보는 바다 속이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싶어졌다.
코끼리 트래킹도 기억에 남는다. 이름만으로는 꽤나 거창한 것 같지만 그냥 코끼리를 타고 어슬렁거리면서 한 바퀴 도는 것이 전부다. 코끼리만이 가지는 묵직한 여유로움이 좋았다. 트래킹 때 타는 코끼리들은 늙어서 서커스단에서 퇴출된 코끼리들이란다. 가까이서 본 코끼리는 아주 멋졌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아직도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했다.
화려하던 서커스단의 추억을 뒤로하고 코끼리들은 이제 관광객을 태우고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코끼리의 털을 지니면 돈을 많이 번다는 미신이 있는지 아저씨는 코끼리 털을 잘라서 주었다. 나는 늙은 코끼리에게 약속을 했다.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너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러 꼭 다시 여기에 오겠다고.
계절이 가고 오길 기다리면서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는다
소란스런 그 여름의 추억은 계절을 거듭할수록 볼륨이 낮추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몇 개의 이미지로만 남았다. 저절로 사라지는 모든 것을 붙잡으려는 절망적인 열망. 그래서 사람들은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약속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수영을 다시 시도해보지 못했고 스쿠버다이빙을 배우지도 못했고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다. 지키지 못한 약속, 이루지 못한 꿈, 가보지 않고 희망만 하는 여행이 많다. 이루지 못한 것, 해보지 못한 것이 그리는 안타까운 열망이 여름을 채우고 있다.
어떤 계절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또 어떤 계절이 오길 기다리면서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는다. 나는 여름을 상상하듯 미래를 생각한다. 인생을 계절로 나눈다면 여름은 몇 살쯤 될까. 원래는 15세 때까지를 초년, 15세에서 30세가량을 청년, 30세에서 45세가량을 장년, 45세 이상을 말년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름은 30세 청년의 시기이지만, 수명도 늘고 사람들이 점점 젊게 사는 것을 감안할 때 여름은 30세 부근을 폭넓게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떤 여름을 보냈느냐에 따라 가을이 달라진다. 여름의 태양이 뜨거울수록 달콤한 과일이 열리고, 여름에 열심히 땀을 흘릴수록 알찬 곡식을 얻는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럴지 모른다.
무르익고 끓어 넘치고 질주하는 시기. 열매를 위해 가장 열심히 나를 불태워야 하는 때. 가장 강렬하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두려운 계절. 여름을 잘 보내지 않으면 풍요로운 가을을 맞을 수 없다.
Epilogue
여름은 강렬하고 화려하고 뜨겁다. 이 모든 아름다운 상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디 한번 해보자. 실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늘 꿈꾸고 희망하는 것, 좋은 것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나쁜 것은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나 같은 낙천주의자들이 복잡하고 뜨거운 인생의 여름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여름을 보내는 어떤 방식 2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 베란다 창문 앞에 서면 저 멀리 도로 위에 가득 찬 승용차 행렬이 눈에 들어온다. 지긋지긋한 이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마지막 인내라도 발휘하는 듯 느릿느릿 미세하게 전진하는 물결이다. 부스스 눈을 비비고 그 흐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들 참 부지런들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래 구절이 떠오르는가 하면, ‘주말을 잘 보내야 성공한다’는 식의 2000년대식 구호도 스친다. 그러다 보면 문득 나만 의미 없는 주말을 보내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어서 뭐라도 걸쳐 입고 집 밖을 나서 교외를 향해 달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물며 여름이다. 소위 휴가철이다. 여름 휴가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일 년을 일한다는 유럽인들 정도는 아닐지라도, 여름 휴가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은 십여 년 새 부쩍 진지해졌다. 최소한 한 달 전부터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웬만한 휴양지 숙박 예약은 진작에 완료됐을 것이고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할 비행기 티켓은 남아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어쨌든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맥을 놓고 있다간 ‘방콕’행이라는 한심한 결과에 직면할지 모른다. 떠나야 한다 어디로든. 나가야 한다. 집이 아닌 어딘가로.
야근에 시달리며 사무실에서 끙끙댈 땐 그렇게도 가고 싶던 집인데, 휴가철만 되면 반드시 떠나야할 곳이 되려 집이다. 누구나 공감하듯 집 떠나면 고생이고 집 밖이면 다 돈인데 말이다. ‘방콕’도 방콕 나름 아닐까.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쉼’이 될 수만 있다면 떠나지 않는다 한들 어떠랴. 마루바닥에 대나무 돗자리 깔아놓고 에어컨, 선풍기 바람 쐬며 뒹굴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읽고 싶던 책이나 읽다 놓아둔 책을 옆에 쌓아놓고 독서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도 썩 괜찮은 피서법이다.
저녁이면 동네 공원에 나가 바깥 바람도 쐬고 밤새 영화 보고 책 읽다가 새벽녘에 만들어 먹는 야참 맛도 끝내준다. 냉큼 삶아낸 소면에 신 김치 송송 썰어 넣고 매운 양념장 곁들여 비벼 먹는 김치 비빔국수, 메밀묵에 갖은 채소 썰어 넣고 식초, 설탕, 참기름 섞어 얼음 동동 띄운 다음 후루룩 말아 먹는 묵국수 맛도 일품일 것이다.
냉장실에 쟁여놓은 수박을 꺼내다가 숟가락으로 맘대로 속을 퍼내 톡톡 쏘는 사이다랑 섞어 마시면 불량식품처럼 정겨운 수박 화채 뚝딱이다. 소나기라도 주룩주룩 퍼붓는 날이라면 냉장고 떨이도 할 겸 온갖 채소를 섞어서 부침개를 지져 먹어도 그만이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시원한 해물탕을 끓여 와인과 함께 곁들인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나 까맣게 그을린 피부는 없겠지만 집에서 제대로 뒹굴거려볼 기회도 그리 흔하진 않다. 지난 후에 허무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휴가법이므로 ‘강추’. 여름을 보내는 데에 ‘왕도’가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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