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쿠키뉴스 2006-08-1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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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 대숲에서 묻어난 은은한 죽향과 다향이 청죽골 푸른 하늘에 동심원을 그린다. 한 줄기 바람이 아침 햇살 머금은 대숲을 어루만지자 서럽도록 흐느끼던 댓잎이 눈물처럼 굵은 이슬방울을 뚝뚝 떨어뜨린다. 기다렸다는 듯 저속의 카메라 셔터가 댓잎의 흐느낌을 정지시킨다. 죽녹원 정자의 창을 화선지 삼아 한 폭의 '풍죽도'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대숲은 죽순이 땅을 뚫고 불쑥불쑥 솟아나는 봄도 운치 있지만 아무래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찾아야 제맛이다.
마을마다 아늑한 대숲을 배경 삼은 전남 담양에서도 대숲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지난해 3월 개장한 담양읍내의 죽녹원. 관방제림과 영산강의 시원인 관방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인산 자락 5만2000평에 조성된 죽녹원은 대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이 송강 정철의 시구처럼 생생하다.
죽녹원 입구에서 석간수로 목을 축이고 야트막한 길을 오르면 죽녹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초록빛 대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한 대숲이 반긴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대숲과 짙은 초록터널 속으로 휘적휘적 사라지는 산책로는 이 땅에서 유유자적하던 선비의 품성을 닮았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어찌 그리 곧고 속은 어이 비었는가/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며 대나무를 노래했다. 속을 비운 대나무의 무욕과 곧은 심성을 가진 대나무의 미덕에서 이제는 사라져버린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도 청죽골 담양이 아닐까.
죽녹원은 모두 8개의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 산책로인 440m 길이의 운수대통길을 비롯해 죽마고우길,사랑이 변치 않는 길,추억의 샛길,성인산 오름길,철학자의 길,선비의 길 등 2.2㎞의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여기에 누(樓)와 정자의 고장답게 대숲 곳곳에 정자를 설치해 잊고 살았던 여유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분죽,왕대,맹종죽 등 다양한 종류의 대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죽녹원은 한낮에도 어둑컴컴하다. 그러나 한 줄기 바람에 댓잎이 일렁일 때마다 비집고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이 대숲에 생명력을 더한다.
대숲은 바람의 세기에 따라 때론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은근하고 때론 성난 파도처럼 울부짖는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댓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성근 대숲을 훑고 지나는 비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처럼 장엄하다.
한여름의 대숲에서 경험하는 죽림욕의 청량감은 산이나 바다와 비교할 바 아니다. 대숲은 다량의 음이온을 발산할 뿐 아니라 푸른 댓잎이 따가운 햇볕을 가려줘 한여름 바깥 온도보다 4∼7도 정도 낮다. 어디 그 뿐이랴. 대숲 1㏊는 1t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0.37t의 산소를 방출하기 때문에 심신이 상쾌하다.
산책로 중간쯤에 자리한 생태전시관은 대나무 분재를 전시한 곳. 대나무로 만든 죽공예품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죽부인이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대오리로 길고 둥글게 만든 죽부인은 선비들이 즐겨 이용하던 피서용구로 문학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대나무는 본래 장부에 비유하였고/분명히 아녀자와 벗할 처지는 아니었는데/어찌하여 침구로 만들어져서/억지로 부인이라 이름지었나/내가 어깨와 다리를 안온하게 괴고 있으면/내 이불 속으로 정답게 들어오네/비록 다소곳이 밥상 시중은 못들지만/다행히 사랑을 독차지하는 몸은 되었네/상여에게 달려갈 다리도 없고/백륜에게 간하는 말도 할 줄 몰라/조용한 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드니/어찌 아름다운 서시가 필요하랴.'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죽부인을 이렇게 칭송했다.
창살 없는 창을 통해 인공폭포와 배롱나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자는 죽녹원 최고의 절경을 정자 속에 꼭꼭 숨겨놓았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로 손꼽히는 탄은 이정이 농담의 대조를 통해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을 그렸듯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댓잎은 정자의 창을 화폭 삼아 한 폭의 '풍죽도'를 그린다.
이른 새벽 댓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나무가 죽녹원에 자생하지 않을 리 없다. 죽녹원의 대숲은 온통 키 작은 죽로차나무로 빽빽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희미한 죽향과 다향을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도 한여름 죽림욕의 매력. 여기에 죽순이 자랄 때 틀을 씌워 사각형이나 삼각형 모양으로 자란 대나무를 찾아 보는 것도 죽녹원 여행에서나 맛보는 재미다.
시인 신석정이 '대숲으로 간다/대숲으로 간다/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고 외치던 청죽골 담양. 담양의 대숲은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마저 청량하게 여과시키는 선비의 미덕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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