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패션】

그래 난 프라다 입는다, 짝퉁으로!

피나얀 2006. 8. 29. 21:14

 

출처-[한겨레21 2006-08-29 08:03]

 

 


 ‘된장녀 제조범’으로 꼽히는 여성잡지 패션 에디터의 눈물 어린 항변… 명품을 곁에 두지만 흠집 날까 손톱도 못 기르는 어디까지나 생활인

 

나, 된장녀 맞나 보다. 된장녀 논란으로 세상이 그렇게 떠들썩하다는데 그 논란이 패션계와 패션잡지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된장녀’가 무슨 말인지 또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허구한 날 패션잡지만 읽고 신문과는 담을 쌓고 사는 여자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스타벅스 커피는 꼭꼭 챙겨 마시는 여자들을 세상은 된장녀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 정말 된장녀 맞다.

 

돌이켜보면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안정된 생활과 고수익을 보장해줄 외국계 은행의 취업 합격통지서를 내팽개치고 ‘일당 3만원’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의 길을 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식구 중 누군가의 입에서 그 비슷한 단어가 나왔던 것도 같다. “쯧쯧, 철딱서니 없기는…. ×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 한다니깐!”

 

뤼이뷔통 핸드백을 ‘모시는’ 처지

 

패션잡지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때 ‘외국계 은행’의 유혹을 그토록 호기롭게 뿌리칠 수 있었을까?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없다. 루이뷔통과 샤넬에 둘러싸여 산다고 해서, 내 삶이 루이뷔통이나 샤넬이 될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내 삶이 루이뷔통 핸드백과 샤넬 트위드 슈트를 ‘모시는’ 위치로 전락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편집장의 비서 노릇을 하는 인턴 에디터에게까지 ‘입어주세요’ 하며 명품 브랜드 옷이 배달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현실과는 달리, 2006년 8월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패션 에디터 역할을 수행하며 사는 나는 프라다 옷을 ‘카피’한 ‘자라’ 원피스 앞에서도 쉽사리 지갑을 열지 못하고, 촬영을 위해 빌린 에르메스 핸드백과 카르티에 시계를 모시면서 산다.

 

촬영을 위해 빌린 제품들에 행여 흠집이라도 생겼다간 내 월급의 몇 배(때로는 수십 배)에 달하는 제품 가격을 고스란히 물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케이스에서 제품을 꺼낼 때는 면장갑을 끼고 조심조심(손톱을 길러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포토그래퍼에게는 수십 번도 넘게 “조심해주세요” 당부의 말을 건네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완동물들이 촬영용 제품에 용변이라도 볼까봐 내내 제품들 곁을 지켜야 한다.

 

촬영용 제품을 픽업할 때 겪는 고초 역시 만만치는 않다. 브랜드 홍보 담당자와 미리 이야기를 끝낸 다음, 물건을 픽업하러 가는 것임에도 매장 직원들은 픽업을 위해 매장에 들른 패션 에디터들에게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기 일쑤다.

 

손님들 상대하기에도 벅찬 그네들 입장에서는 물건을 사가지도 않는 ‘주제’에 비싼 물건을 꺼냈다 넣었다 하게 만드는 에디터들이 귀찮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애써 자위해보지만, 내 앞에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어휴, 바빠죽겠는데. 기다리세욧!” 해놓고, 다른 손님들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 태도로 돌변하는 몇몇 매장 직원들의 이중성을 직접 목격할 때면 눈물이 핑 돌 만큼 서럽기도 하고,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나도 이 정도는 살 수 있거든요?”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부지기수. 그러나 참아야만 한다. 휘황찬란한 패션계의 한구석에 몸담고 있고 루이뷔통이나 프라다를 시장 브랜드 제품만큼이나 가까이에서 접하긴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생활인이다. 내 나이 또래 여성 직장인들의 평균치가 될까 말까 한 월급을 쪼개고 쪼개 집세를 내야 하고, 적금을 부어야 하며, 적게나마 부모님 용돈도 보내드려야 하는 생활인!

 

쇼핑은, 그렇게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호기롭게 카드를 꺼내 드는 대신, 컬렉션 취재를 위해 파리나 밀라노 같은 패션 도시를 갔을 때 한다. 그래봤자 ‘자라’나 ‘H&M’ 같은 중·저가 브랜드 매장이나 50∼70%까지 할인되는 명품 브랜드들의 철 지난 아이템들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게 전부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며 통장 잔액을 계산하고, 옷장에 있는 옷과 어떻게 매치할지를 끝없이 고민하며 가장 경제적인 쇼핑 방안을 모색하면서. 그리고 가끔은, 이태원 시장을 찾아 진짜와 거의 진배없는 짝퉁 마크 제이콥스 원피스와 마르니 목걸이 같은 것을 사기도 한다. 트렌디한 아이템들을 정가의 10%에도 못 미치는 값으로 구입할 수 있는 이태원 시장은 트렌드를 무시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패션 에디터들에게는 트렌드를 좇으면서도 빚더미에 올라앉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탈출구인 셈이다.

 

흥청망청 파티? 생활의 전쟁터!

 

그런 것들로 한껏 몸을 치장해 패션계 파티에 가고, 특급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한다. <섹스 앤 더 시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세뇌당한 사람들은 그런 행사나 파티가 그저 즐겁고 흥청망청하는 분위기의 ‘놀자’판이라고 상상할지 모르겠지만, 패션계 종사자들에게 그곳은 생활의 장이자 전쟁터다.

 

그곳에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들으면서 패션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패션업계 사람들과 친분도 쌓아야 한다. 10cm 하이힐에서 한시라도 빨리 퉁퉁 부은 발을 해방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집에 가서 빨리 몸을 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참아야 한다. 마감 기간에는 또 어떤가? 어떤 날은 오전 10시에 출근해 새벽 1시에 퇴근하고, 또 어떤 날은 오전 10시에 출근해 새벽 3시에 퇴근하고….

솔직히, 신문 못 본 지 한참 됐다.

 

주요 뉴스들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대충 훑어보는데 조간 신문은 잘 못 본다. 신문 볼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비웃을까? 하지만 사실이다. 대신 전세계 패션계의 동향을 알려주는 같은 패션 신문이나 주요 패션 뉴스를 전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체크한다. 베스트셀러 소설? 그것도 잘 못 챙겨본다. 기사 쓰는 데 참조하기 위해 새로 산 패션 관련 책들이나 사회과학 서적들 보기에도 빠듯하다.

 

이런 나를 ‘된장녀’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즈음의 패션지들이 오로지 트렌드를 전달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기사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게 아니라, 패션을 삶과 사회 현상의 한 부분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다각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패션 기사를 쓰기 위해, 다각적인 시각으로 패션을 분석하는 패션지를 만들기 위해, 나는 ‘패션 에디터’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들고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러 가고, 사회과학자를 만나러 가며, 인류학자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패션지가 머리에 ×만 가득한 여자들을 위한, 읽을 만한 가치는 전혀 없는 기사들로 채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가장 즐겨보는 패션지가 무엇이고, 최근 3개월 동안 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패션 기사가 무엇이었는지. 만약 패션지라고는 어쩌다 미용실이나 카페에 놓여 있는 철 지난 잡지들을 슬슬 넘겨본 게 전부면서 그렇게들 떠들어대는 것이라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제목처럼 “제발 조용히 좀 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 가끔 나도 후회한다.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이렇게 야근에 시달리지 않고, 몇 개씩이나 되는 촬영용 짐을 들고 청담동 길바닥을 헤매는 일도 없이 지금보다 더 ‘폼 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럴 때면, 면접관 앞에 앉아 있는, ‘패션 에디터가 되고 싶은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인 스물다섯 살의 내가 떠오른다. 왜 패션 에디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패션지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 꿈꿀 수 있게 해주잖아요? 언젠가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팍팍한 현실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꿈꾸게 해주고 싶어요”라고 또박또박 말하던 내 목소리도.

 

손가락질한대도 어찔할 도리 없어요

 

안정된 삶과 높은 연봉은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지금의 내 삶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람들 생각만큼 ‘폼’ 나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 기사 너무 좋았어요”라고 꼬박꼬박 엽서를 보내주는 독자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엽서를 보내주진 않지만 내가 쓴 글과 우리가 만든 책을 보면서 밝은 내일을 꿈꾸는 사람 또한 분명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된장녀라고 계속 손가락질한대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 나 된장녀다.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다, 왜?”라고 대답할밖에.

 


 

칙릿이 세계 대세?

20대 여성 타깃 마케팅의 절정, 인도·동유럽 넘어 국내에도 상륙
 

최근의 ‘된장녀 논쟁’에서 ‘된장녀’들의 필독서로 꼽히기도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 펴냄)는 ‘칙릿’이다. 소설은 기자를 지망하는 앤드리아가 패션지 <런웨이> 편집장 개인 어시스턴트가 되어 수모를 겪다가 결국 패션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한다는 줄거리다.

 

칙릿(chick-lit)의 ‘chick’은 젊은 여성을 일컫는 미국의 속어(lit는 ‘literature’의 줄임말)로, 칙릿은 20대 싱글 직장(주로 광고, 잡지, 패션 등의 업종) 여성의 성공과 사랑을 다루는 소설을 말한다. 8월에 출간된 <이것은 칙릿이 아니다>(This is not a chick lit)는 칙릿이 “대도시에 사는 여성이 짝을 애타게 찾아헤매며 다이어트를 하고 신발 쇼핑을 하며, 자주 절망하지만 결국 훌륭한 왕자를 찾는 줄거리”라고 말한다.

 

이에 상대되는 닉 혼비 등의 남자 소설은 ‘래드릿’(lad lit), ‘딕릿’(dick lit)으로 불린다. 1995년 <칙릿: 포스트페미니즘 소설>에 처음 등장했지만, 1996년 제임스 월콧이 <뉴요커>에서 당시 여성 컬럼니스트의 ‘소녀스러운’(girlishness) 경향을 일컬으며 대중에 회자되는 단어로 다듬어졌다(위키피디아). 이후 칙릿의 고전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나오고, 월콧이 칙릿이라는 단어를 이끌어낸 칼럼니스트로 주인공이 설정된 TV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가 등장했다. 2000년 이후 칙릿은 베스트셀러 상위를 휩쓸면서 하나의 분명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올 3월 <뉴욕타임스>는 ‘칙릿이 대세’라는 기사에서 인도와 동유럽 국가까지 파급된 칙릿을 주목하기도 했다. 이들 나라에는 공통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일하는 여성의 생활을 다룬 소설이 순위에 올랐는데 그 나라에 적합한 형식으로 변형되어 있다. 예를 들어 폴란드의 <파리로 가지 못하리>에는 납치나 살인 같은 비극적인 요소가 삽입되고, 스웨덴의 <작은 노란 레몬>에는 모든 것을 갖춘 여성의 일상이 조금씩 어긋나는 과정을 다룬다고 한다.

 

칙릿으로 분류될 수 있는 소설은 국내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외에도 여러 권이 번역되어 나왔다. <처음 드시는 분들을 위한 초밥>(메리언 키스 지음, 열린책들 펴냄)은 패션잡지사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분투기를 다루고 있으며, 현재 4부까지 나온 ‘쇼퍼홀릭’(소피 킨셀라 지음, 황금부엉이 펴냄)은 20대 쇼핑 중독 여성이 자신의 상품을 보는 안목을 살려 성공하는 스토리다.

 

출판에서 20대 여성을 위한 시장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칙릿은 이러한 20대 여성 타깃 마케팅의 한 절정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결론이 ‘꿈을 찾아 떠나는’ 것이지만, 이 소설의 유인 요인은 스토리가 아니라 주인공이 분투하는 생활 자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브랜드명과 유명 레스토랑 식당, 분위기 있는 바와 유명인사가 후두둑 떨어진다.

 

(만화 제목으로 이야기하자면) 성공은 생각하지 않고 잡일 처리에 자족하며 사는 ‘OL 진화론’의 OL들과 예뻐지는 것만을 지상과제로 삼는 ‘미녀는 괴로워’ 같은 직장 없는 여성, 일할 때는 ‘남자’로 변신하는 ‘워킹맨’(안노 모요코) 같은 스타일 생각하지 않는 여성은 여기에 없다. 칙릿의 진정한 주인공은 브랜드 명품과 스타일이다. 여기에 직장은 스타일과 트렌드가 강조될 수밖에 없는 배경인물이다.

 

직수입된 문학을 그대로 집어삼킬 수 있는 왕성한 소화력에 국내문학에서 칙릿이 발붙이기는 힘들 것 같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를 이 부류에 넣어 ‘한국화’를 거론할 수 있을 듯도 하다. 무엇보다 ‘칙릿’ 트렌드의 진정한 한국형은 여성을 위한 ‘뉴욕’ 여행서나, <여자생활백서> 같은 여성 처세서, 전문가가 ‘칙’이 되는 길을 코치하는 <스타일 북>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