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캄보디아① 기억의 저편, 황토빛 목동의 꿈

피나얀 2006. 9. 21. 01:11

 

출처-[연합르페르 2006-09-20 11:31]

 

폭우 뒤 먼지 풀풀 날리던 황톳길 위에 목동의 꿈이 펼쳐지고 있다

뽀얀 흙먼지가 훅 끼쳐온다. 차창을 보호막 삼아 에어컨 밑으로 머리 각도를 맞출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가는 숨소리로 괴로워하던 에어컨은 몇시간 후에 절명하고 말았다.

 

고장난 모터처럼 제 장단에 신이 난 버스는 태국 방콕과 캄보디아 씨엠리업을 잇는 장장 8시간의 마라톤을 고독감도 없이 완주했다. 버스의 급한 성미를 비웃듯 맨발의 목동은 끝도 보이지 않는 벼 들판과 먹구름 낀 하늘 사이로 유유히 멀어져 갔다.

 

부활을 꿈꾸는 제국으로의 시간여행

 

태국과 캄보디아의 경계도시는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태국의 아란야프랏떼와 캄보디아의 포이펫(Poipet)이다. 국경도시다운 북새통이다. 짐을 가득 싣고, 사람을 가득 싣고, 매일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떨어뜨리고 갈 푼돈을 보고 꾸역꾸역 모여드는 이들이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국경은 철조망 둘러친 살벌한 풍경이 아니다. 물류가 오고가고 사람과 동물이 뒤엉킨 소란스런 장터다. 온갖 종류의 '탈 것'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을 싣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를 한다.

 

모자 네 개를 두 개씩 나눠 양쪽 가슴에 구겨 넣는 여인의 밀반입은 비밀스럽지도 않다. 동생을 들쳐 업은 아이들이 '원 달러'를 외치며 우르르 소나기처럼 쏟아져 다니고, 툭툭(삼륜 오토바이) 운전사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무료한 태양을 견디고 있었다. 조화를 깨는 유일한 풍경은 커다란 가방을 끌며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를 배회하는 여행객들의 행렬이다.

 

아이들에게 함부로 적선하지 말하는 경고가 있었다. 슬그머니 한 꼬마에게 동전을 쥐어준 이는 금세 아이들의 표적이 되어 끈질긴 추적을 당한다. 들키고 싶지 않은 표정, 마주치고 싶지 않은 시선을 짙은 선글라스 뒤에 숨겼다. 그러나 어린 동생을 허리춤에 두르고 종종걸음 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햇살보다 따갑게 눈에 들어와 박혔다.

 

30년간의 내전으로 피폐해진 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폭압에 사라져간 어른들이 아니라 얼굴 가득 부스럼이 핀 맨발의 아이들이다. 캄보디아 어디에나 관광객들이 있는 곳이라면 이런 아이들이 있다. 목걸이 볼펜을 톡톡 당기는 작고 무례한 손에 볼펜을 벗어주고 돌아섰다.

일거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포이펫으로 몰려들고 있다

국경을 넘어 폭우 속을 달리다

 

가랑비에도 꼭 우산을 펼쳐드는 것은 얼마나 신경과민한 습관인가. 비 한 방울만 떨어져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붕 아래로 뛰어드는 것은 스타일 유지를 위한 필사의 노력인가, 산성비의 공포인가.

 

먼 하늘에서 시커먼 기운이 덮쳐오고 있었다. 사나운 비구름은 이미 한 뼘씩 마른 땅을 초토화시키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인도차이나 스콜의 실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섭게 쏟아 붓던 비는 다행히도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세가 실로 위협적이고 파괴적이었다. 단 10분만에 거리엔 큰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황톳물이 넘실넘실 발목까지 차올랐다. 이 순간 당황스럽고 불안한 사람은 우산의 무력함을 확인한 이다.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길을 걷던 목동도 결코 행보를 늦추지 않는다. 이걸 무심하다고 해야 하나. 사실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비를 피할 마땅한 건물도 없다. 맞으면 멍이 들 듯 세찬 빗속에 흰 소 한 마리가 그림처럼 서 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은 오히려 때를 만난 듯 흙탕물에 퍼질러 앉아 엉덩이를 질질 끌며 물미끄럼을 탄다. 옷 버린다고 야단치는 엄마도 없고, 버릴 옷도 없다. 받아놓은 빗물에 빨래를 하고 식수로 사용하는 그들이다. 집집마다 수초와 개구리밥으로 덮인 웅덩이가 있고, 그 고인물이 이들에겐 생명수다.

 

신들의 도시, 씨엠리업

 

앙코르 유적지의 관문도시 씨엠리업(Siem Reap)은 많은 외국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이들을 위한 서양식 레스토랑과 펍(pub)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고급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 사이에서 인터넷 카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평양랭면'이나 '서울가든'같은 남한과 북한의 레스토랑도 큰 간판을 내걸었다. 캄보디아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무려 90년간 지속됐던(1863-1953년) 프랑스 식민시절부터다.

 

아직도 노년층 중에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된다. 캄보디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심도 각별하다. 해마다 수백 만명의 관광객이 앙코르 유적지를 보기 위해 몰려오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인이다. 앙코르(Angkor) 유적지를 보고 감동을 받은 프랑스인들이 ‘앙코르!, 앙코르!’ 하고 외쳤던 것이 오늘날 앙코르(Encore)의 어원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앙코르를 평생 동안 두 번은 방문해야 지성인 축에 속한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전통문화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했던 것은 킬링필드의 비극을 낳은 크메르 루주 정권이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군이 나라를 장악한 4년 동안 170만 명의 지식인, 관료들이 학살당하거나 해외로 추방당했다. 인구 7명당 1명꼴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고 일부는 마무리 단계에 있던 앙코르 유적의 복원작업도 내전의 소용돌이에 말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30년간의 내전은 역사를 복원할 돈도, 사람도 남겨놓지 않았다.

씨엠리업으로 가는 비포장도로 주변의 전원 풍경

캄보디아가 전쟁의 상처를 지우고 평화를 되찾은 것은 불과 90년대 말의 일이다.나라를 재건할 인재들을 육성하는 것이 현재 이 나라의 가장 큰 과제다. 국경을 개방했으며 아이들과 극빈층을 돕기 위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는데도 적극적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관광객들의 출입이 더욱 빈번해졌고, 나라살림에도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앙코르 유적지의 매력에 이끌려 여러 차례 이 도시를 찾은 사람들은 빠르게 변하는 씨엠리업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해 한다. 캄보디아적인 그 무엇이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60~70년대의 한국이 그랬듯 지금의 캄보디아에는 빈곤의 탈출과 개발 외에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Tip_ 시엠리업

 

앙코르 유적지 남쪽에 위치한 씨엠리업은 국제공항까지 갖춘 캄보디아 제3의 도시다. 인구 7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외곽 7km 지점에 위치한 앙코르 유적지를 기반으로 관광산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있다. 남쪽으로 14km에 자리잡은 톤레삽 호수도 커다란 관광자원이다.

 

배낭여행객들을 위한 유스호스텔도 많지만 최근에는 호텔과 서양식 레스토랑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도시 북부에는 아예 본격적인 호텔개발을 위해 호텔존(Hotel Zone)을 닦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