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여름과 가을이 함께 있어 아름다운 길

피나얀 2006. 10. 1. 21:07


출처-[오마이뉴스 2006-10-01 11:42]

 

 

 

 

▲ 아름다운 가을 길

 

ⓒ2006 박옥경

 

나의 출근길은 여유로워 좋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야 수업을 시작하는, 특수하다면 특수한 직업을 가졌으니 보통의 직장인들과는 달리 오전 시간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언젠가 나더러 무슨 일을 하냐고 묻길래 오후에 출근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했더니, 그게 뭐냐고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하던 분이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그분의 눈빛이 아주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 수세미의 가을
ⓒ2006 박옥경

하긴 오후에 출근하고 야심한 시각에 퇴근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맞긴 맞다. 시험 기간에는 더구나 야행성이 되어버린다. 늦잠꾸러기가 되기 딱 알맞은 직종이다. 좀 일찍 일어나면 남들보다 일을 몇 배로 하는 듯하여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바쁘게 다니던 출근길을 오늘은 작정하고 일찍 나서서 느긋하게 걸어보기로 했다. 직장이라야 걸어서 20분 남짓 거리에 있지만 오고 가는 그 길에 얼마나 많은 꽃과 과일과 계절이 어울려 있는지 모른다. 알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스치던 풍경을 오늘은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 대추가 옹골지게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2006 박옥경

계절은 칼 같이 왔다가 칼 같이 단번에 가는 것이 아니어서 여름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고 가을은 가을대로 자신의 향취를 풍기고 있다. 우리 집은 새로 난 소방도로변에 있다. 도로를 내면서 빈 터들은 대부분 텃밭을 만들어 이것저것 심어 놓았는데 집을 나서면 우선 도라지꽃이 눈에 띈다. 흰색도 예쁘지만 나는 보라색을 굉장히 좋아해서인지 보라색 도라지꽃이 훨씬 예쁘다.

 

▲ 도라지꽃의 보랏빛이 좋다
ⓒ2006 박옥경

보라색을 좋아하면 고독한 성격에 예술가적 기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내 표현이고 우리 딸은 한마디로 ‘사이코 기질’이 있다고 한다. 요즘 애들과 이렇게 표현의 차이가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아쉬움을 담고 있는 듯한 여름 꽃들
ⓒ2006 박옥경

조금 더 걷다 보면 감, 대추, 은행, 모과, 피마자, 수세미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느 집 담 밑에는 아직도 채송화가 피어 있고 봉숭아가 손톱에 꽃물들이라고 유혹하고 있다.

 

▲ 해바라기의 청춘
ⓒ2006 박옥경


 

▲ 그리고 쇠락
ⓒ2006 박옥경

해바라기는 키가 껑충한 채 노란 색 꿈을 물고 있는 듯하지만 발밑에 씨가 총총히 여물어 누운 모습이 청춘과 노쇠한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 담쟁이 넝쿨을 헤치고 잠자던 공주가 손짓할 것 같다
ⓒ2006 박옥경

갑자기 재채기가 난다. 별처럼 핀 금목서 꽃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혔기 때문이다. 알레르기성 비염 증세가 있어서 환절기에는 재채기가 심하다. 금목서 곁에 가면 재채기부터 해서 금목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곳을 지나면 어린이집이 있다. 동화 속의 궁전같이 담쟁이 넝쿨이 가득 감싸고 있다. 작은 창문을 열고 잠자던 공주가 웃으며 손짓할 것 같다.

 

▲ 꽃밭과 어울린 육교
ⓒ2006 박옥경

곧장 가지 않고 왼쪽 길로 돌아서 가본다. 여고 앞의 육교가 보인다. 조성해 놓은 꽃밭과 어울린 배경이 아름답다. 육교 아래 풀섶에서 달맞이꽃은 아직 그 노란 빛을 거두기가 아쉬운지 밝고 환하다. 망초꽃 곁에는 잘 말라가는 풀들이 바람에 함께 흔들린다.

여름의 화려하고 뜨거웠던 열정과 가을의 차분하고 성숙한 조락은 한편으로는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가을은 이처럼 결실과 함께 조락의 아픔도 가졌으니 오는 봄이 또 가치 있는 것인가? ‘올해 핀 꽃은 작년의 그 꽃이 아니지만 작년의 그 꽃’이라는 어느 분의 말을 화두로 삼고 있는데 그 깊은 뜻은 잘 모르겠다.

 

▲ 피마자의 가을
ⓒ2006 박옥경

이것을 잘 생각하다 보면 인생이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다. 떨어지는 저 잎이 작년의 잎이 아니나 작년의 잎과 같다고 생각하면 글쎄, 한 소식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 소식은 고사하고 마음이 더 무겁고 복잡해진다.

생각이 많아지다가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는 텃밭 곁에서 분홍빛 화사한 무궁화 꽃을 보았다. 파랗고 맑은 가을 하늘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차를 기다리는 지겨움도, 빽빽한 사람들 틈에 서서 가야 하는 고달픔도 없는 여유로운 나의 출근길은 이렇게 여름과 가을이 함께 있어 더욱 아름다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