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피레네 산맥에서 꾸벅꾸벅 졸다

피나얀 2006. 10. 9. 23:26

 

출처-[오마이뉴스 2006-10-09 08:42]



▲ 순례자들
ⓒ2006 정민호
외국인들 사이에서 잔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일찍 깼다. 그때 시간은 새벽 6시 10분 전. 갈증을 느껴 정수기를 찾아다니다가 부엌에서 주인할머니를 만났다.

전날 슈퍼에서 샀던 작은 물통을 내밀며 물 좀 달라고 했는데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한다. 주인할머니가 냄비 두 개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솰라솰라' 하는데 당연히 해석불가. 그저 이른 아침 호숫가의 종달새가 지저귀는 것 같다는 인상만 받았다.

그래서 대충 아무거나 하나 골랐는데 커피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커피가 웬 대접에 담겨온다. 넉넉한 인심에 할말을 잃었다. 그 와중에 텔레비전은 프랑스어로 떠들고 식탁 위에서는 바게트와 잼, 그리고 버터가 나를 보며 생긋 웃는다.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는데 주인할머니가 내게 칼과 나이프를 준다. 받기는 받았는데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지. 잼 바르는데 숟가락만 이용하던 나로서는 내 손에 든 것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이런 내 행동을 오해했는지 주인할머니가 먹는 시범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나를 향해 "오케이?" 한다. 무조건 '오케이'했다. 하지만 역시 어색한지라 몇 개 먹고 일어났다. 다시 물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전날 내게 도움을 줬던 두 명의 외국인을 또 만났다. 그녀들의 이름은 포와 브라우어닝. 모녀라고 한다. 영국인인가 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왔다고 한다.

그녀들도 나와 함께 물을 찾는데 물 뜰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자전거 끌고 나타난 독일인 할아버지가 화장실로 가란다. 우리 세 명 당황해서 서로 멀뚱멀뚱 보는데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한다.

'설마 먹고 죽기야 할까'하는 생각으로 화장실에서 물을 뜬 뒤 배낭을 둘러매고 주인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때만큼은 한국어로 "감사합니다!"하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랬더니 나를 향해 합장한다. 당황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일본인이 내게 장금이를 묻다

▲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각종 표시가 있어 길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길 잃을 염려는 없다.
ⓒ2006 정민호
오늘의 목적지는 론세스발레스. 나폴레옹 코스라고 불리는 이 길은 험한 걸로 유명한지라 많은 이들이 택시를 타고 간다고 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들었던 나는 '4시간만에 넘어주겠다!'는 다짐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시간이 오전 7시인데도 주위가 캄캄하다는 것에 놀라고 또한 영화에서만 보던 유럽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에 놀라며 발에 힘을 주는데 저 앞에서 동양인이 아시아식 영어로 내게 말을 건다. "나올 때 스탬프를 찍었느냐"는 거다.

안 찍었다고 하니 일본어로 중얼거린다. '일본인이었군! 다케시마 타령만 해봐! 너 죽고 나 죽는 거다!'하고 걷는데 그가 나를 따라온다. 저 인간이 왜 따라오나 궁금해 하다가 웃고 말았다. 화살표나 상징물을 보고 걷다보니 그런 것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각종 표시가 있어 길을 알려준다. 당연히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때문에 가이드북이 없던 나도 낙담하지 않고 알베르게 있는 도시가 체크된 종이 한 장 달랑 갖고 움직일 수 있던 것이다.

한참을 가는데 일본인이 말을 건다. 막연한 적개심(?)을 갖고 있던 나는 긴장하며 들었는데 질문인즉 "장금이 알아?"였다.

웬 장금이? 스요시라는 이 친구, 알고 보니 한국 방송을 아주 좋아한단다. 한류의 영향을 먼 곳에서 확인한 셈. 장금이를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 상대 나라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나누며 걷게 됐다. 물론 서로 쉬는 곳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다 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금방 헤어지게 됐지만.

길은 아름답다. 하지만...

한참 길을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엽서에나 나올 풍경들이 동서남북으로 뻗쳐있다. 감탄에 감탄을 하며 걸었다. 그러기를 4시간.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발바닥은 후끈거리고, 배는 고프고, 가방은 무겁고, 티셔츠는 땀에 젖어 촉감이 이상했다. 한마디로 지친 것이다. 게다가 작은 물통의 물은 금방 사라진 상태. 그때부터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헥헥 거리며 걷는데 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물이 있나 싶어 갔는데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라서 모여 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빈 물통을 끌어안고 주저앉았더니 사람들이 물을 주려고 한다. 그들에게도 귀하다는 걸 아는지라 "노, 땡큐!"를 했는데 다들 자기가 가진 물통이 서너개는 되니 사양 말란다. 귀중한 도움을 받았다.

물은 해결됐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 게다가 끝이 언제인지도 막막한 상황. 그때서야 순례자여권 만들때 안내문을 받았다는 걸 기억하고 찾아봤다.

'론세스발레스 가는 길은 27㎞이며… 1300m짜리를 넘어야 하고… 8시간이 걸리며… 아주 나쁜 날씨일 수도… 충분한 물을 확보하고… 가는 길에 슈퍼가 없고… 론세스발레스에도 슈퍼가 없고… 그러니 먹을 것은 생장피드포르에서 준비하고….'

배고파, 라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봤다. 무슨 우연인지 갑자기 강풍이 불어왔다. 젖은 티셔츠가 추워지는 순간이었다.

▲ 중간중간 휴식은 필수다.
ⓒ2006 정민호
길이 보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갈 길이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소리를 주고받은 적이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것이 짧은 생각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여기서는 갈 길이 보인다. 보이기는 보이는데 문제는 까마득하다는 것.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힘겹게 걷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질문이 하나로 모아진다. 처음에는 "일본인이야?""중국인이야?" 하던 그들, 다들 "오케이?" 한다. 그야말로 '오케이 타령'이다. 앞으로 걷는다고 걷는데 내 몸은 옆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그랬던 것 같다.

10분 걷다 5분 쉬기를 몇 번, 쉬는 시간이 짧아서 이런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20분간 푹 쉬기로 하고 주저앉았다. 그랬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피레네 산맥에서 꾸벅꾸벅 거린 것이다.

누군가 소리쳐서 눈을 떴다. 지나가던 순례자였다. 그 또한 나를 향해 "오케이?" 한다. 그를 보며 이러고 있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가방을 둘러메고 일어났다. 술 취한 것처럼 좌우로 움직이면서도 걸었다. 어쨌거나 길은 가라고 있는 것이고, 나는 그 길을 가려고 먼 곳까지 왔으니까 입술 깨물고 걸었다.

포크와 나이프로 생선을 먹으라니!

▲ 론세스발레스 알베르게
ⓒ2006 정민호
론세스발레스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반. 지나가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보이는데 왜 그렇게 반갑던지!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다. 스요시와도 마찬가지. 막연한 적개심의 자리에는 반가움만 가득하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오후 4시에 문을 연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는데 이게 왜 그렇게 꿀맛이던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일본인이지?" 라고 묻는다. 그래서 집에서도 안 입던 붉은 악마 티로 갈아입어 봤지만 효과는 없다.

안내문에 나온 것처럼 이곳에는 정말 슈퍼가 없다.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특이하게도 순례자를 위한 메뉴가 있다. 가격은 8유로. 자리가 부족한지라 다들 합석했는데 나는 벨기에 부부와 프랑스인 세 명, 스요시와 합석하게 됐다.

이번에도 처음 날아오는 질문은 일본인이냐는 것. 한국인이라고 말했더니 프랑스 신사 모리스가 티셔츠를 유심히 본다. 그리곤 "뭘 '어게인'해?"라고 묻는다. 축구, 라고 했더니 묘한 웃음을 짓는다. 무슨 뜻이지?

식사가 나오는데 처음은 웬 꼬부라진 짧은 면발이다. 이게 뭐야 싶은데 다들 잘도 먹는다. 포크로 하나 찍어먹었는데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프랑스인 마이키에게 물었더니 파스타란다.

밀어내고 싶지만 배가 고파서 다 먹어치웠다. 곧바로 정식 요리가 나온다. 쟁반에 담긴 것은 삶은 감자와 생선 두 마리. 다들 먹기 바쁜데 나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밥 없이 생선 먹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포크와 나이프로 생선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 사람들은 쟁반에 남은 기름들을 바게트로 싹싹 발라먹는다는 것.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게 맛있을까 싶은데 다들 냠냠 잘도 먹는다. 이 사람들 정말 특이하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깜짝 놀랐다. 빨래를 널어둔 곳이 황량했기 때문이다. 내가 널어놓은 것들 몇 개만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설마, 하며 가서 만져봤다. 이미 마른 상태. 이곳 태양이 강렬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빨래를 걷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고 당황스럽고 기가 막히고 놀랍고 재밌다. 그 와중에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잘 왔다, 라는 것을. 무모한 여행의 이틀째는 그렇게 흘러갔다.


덧붙이는 글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