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티베트, 그곳은 영원히 점령되지 않는다

피나얀 2006. 10. 19. 21:19

 

출처-[미디어오늘 2006-10-19 00:12]




두 바퀴로 지구의 지붕을 오르다③(끝)

 

해는 이미 에베레스트 뒤쪽으로 숨고 어둠이 깔린 베이스캠프는 큰 텐트촌을 이루고 있었다.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강풍과 추위를 한국에서 가져간 텐트로 막아낼 수 없었다. 티베트의 전통적인 유목민 텐트(사각형의 천막) 한 동을 빌렸다. 야크와 양의 똥을 말린 것을 땔감으로 한 난로가 불타고 있었다. 뜨거운 버터차를 마시니 속이 좀 풀린다.

 

초죽음의 하루를 보내고 다들 지쳐 쓰러져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을 청한다. 해발 5200m가 주는 심리적인 현상인지, 자꾸 숨이 차 오른다. 텐트 안이라지만 귀가 시려워 침낭 안으로 머리를 넣고 싶어도 그러면 숨을 못 쉴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이런 게 죽는 거구나.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면 어쩌지."

 

별의 별 망상이 지나간다. 아내와 아들 사진을 손에 꼭 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소용없다. 밤새 가쁜 숨을 토해내며 선잠을 잤다.

 

아침이 밝았다. 다들 살아있지만 표정이 밝지는 않다. 잠을 설친 거다. 해가 떠오르기 전 베이스캠프 앞 작은 언덕에 올랐다. 룽다가 날리는 언덕은 에베레스트에 목숨을 바친 산악인들의 추모비들이 큰 돌 사이에 세워져 있다. 잠시 묵념을 하고 명복을 빌어본다.

 

"산다는 게 뭐고 죽는다는 게 뭔가! 사는 게 별거 아니구나. 저 거대한 에베레스트 고봉 앞에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허물어지는 경지가 있는 것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올랐다는 기쁨에 3일 남은 라이딩 일정은 자신이 있었다. '뭐든 할 수 있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은 고개는 팡라(Pang la, 5200m)와 라룽라(Lalung la, 5050m)였다. 대원들 모두 힘찬 페달질로 베이스 캠프를 내려와 팡라로 향했다. 팀라이딩을 유지했던 대원들은 이제부턴 각자의 페이스대로 달려볼 기세였다.

 

팡라 고개길을 올라서기 전 에베레스트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물이 우리 일행을 막았다. 우기가 끝난 지 얼마 안돼 수량이 많아 조그만 다리는 무용지물이었다. 우왕좌왕 도하를 시도하던 사이 내가 사고의 당사자가 됐다. 바위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바위에 왼쪽 눈 밑을 부딪친 것이다. 피가 흐르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왼쪽 무릎도 시큰거렸다.

 

가장 가까운 올드팅그리(Tingri)로 후송이 결정됐다. 랜드크루저에 실려 팅그리의 작은 병원(5평도 안되는)에서 치료를 받고 게스트 히우스로 이동했다. 지난 13일 동안의 여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놀란 대원들도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늦게 팅그리로 들어온 대원들은 파김치 직전이었다. 팡라는 최악의 코스였다. 해발을 500m만 올린다는 말은 수직이동시의 경우이고, 고원지대인 팡라의 해발 500m 이동은 긴 동아줄을 제멋대로 꼬아놓은 최악의 자갈밭 길이었다.

 

차가운 개울물에 자전거와 함께 빠지고 체력이 바닥난 대원들은 고개에 길게 늘어섰고 지원차량 한 대로 전 팀을 커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명이 물에 빠져 추위에 떨며 팡라를 넘었고 1명은 허벅지 타박상에 상의가 찢어질 정도로 급경사 20여m를 굴렀다.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등정의 달콤함이 결국 쓴 독약이 되어 우리의 겸손치 못함을 질타했다.

 

"그래. 히말라야 신들이 결국 이렇게 우리의 오만과 교만을 심판하는구나."

부상자 속출…최악 라이딩으로 라룽라를 넘다

다음날 아침 난 라이딩을 접기로 했다. 눈이 부어올라 거리 감각이 없었고 왼쪽 무릎이 펴지질 않았다.


자전거를 접고 자동차에 오르는 부상자 신세가 됐다. 팡라의 끔찍한 경험에 다들 풀이 죽어 있었지만 이제 이틀만 가면 여정이 끝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라룽라는 또 최악의 고개가 됐다. 우박이 와 시간을 잡아 먹는가 했더니 한 굽이 좌로 돌면 또 우로 한 굽이 돌고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리며 고개는 좀처럼 정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야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어둠이 깔리고 자동차 라이트에 의지해 겨우 목적지에 이르렀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 니알람(Nyalam)까지의 내리막은 모래바람과의 전쟁이었다. 내리막길에 자전거가 이동하지 않을 정도의 태풍과 같은 바람에 할 말들을 잃었다. 니알람을 지나자 14일간의 고통을 보상이라도 하듯 진풍경이 펼쳐진다. 해발을 2000m 낮췄는데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산이 녹색이다. 푸르다. 하늘에서 폭포가 내리는 것처럼 산 여기저기 정상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실타래를 이루며 내린다. 318번 국도. 국경도시 장무까지 펼쳐진 장관은 우리를 하늘과 맞닿은 티베트에서 땅으로 내려놓는 하산 길이었다.

 

"아. 이제 한동안 자전거를 못 타겠다. 아니, 타지 않을 거다."

다들 한마디씩 쏟아낸다.

 

우정공로의 끝, 장무에 섰다. 우정공로(Friendship Highway). 그 오랜 세월 이 길을 통해 불교가 넘어가고, 이 길을 멀리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다람살라로 들어가던 달라이라마가 있었고, 이길 한켠을 배와 팔다리로 비비며 수개월을 오체투지하던 순례자가 갔던 길.

 

그 우정공로에 우리의 자전거도 바퀴자국을 남겼다. 바퀴를 통해 전해지는 그 길의 역사를 올곧게 새기진 못했지만 곧 그 모든 역사가 아스팔트 밑으로 묻히는 전 마지막 여정이라는 데 위로를 삼아본다.

 

급변하는 티베트 바라보는 자주적 관점 아쉬워

 

이 글을 쓰는 중에도 티베트에 대한 방송과 기사들이 연이어 나왔다. 가히 '티베트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언론이 난리다. 7월에 뚫린 칭짱열차가 계기가 된 것이다.

 

일찍이 달라이라마는 칭짱열차를 문화적 대학살이라며 반대해 왔다. 중국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서북공정의 교두보가 열린 칭짱열차를 중국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중국 외교부는 자국 주재 외국특파원들을 칭짱열차에 태워 라싸에 데려다 놓고 위대한(?) 역사와 티베트 자치에 대한 선전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중국이 점령한 지 56년이 되는 티베트. 120만명의 티베트 사람들이 죽었고 현재 20여만명의 중국 군인들이 주둔하는 땅이 티베트다. 그럼에도 티베트인들의 가슴 속에는 달라이라마를 품으며 마니차를 돌리고 불경을 외며 포탈라궁과 조캉사원에는 순례객들이 들끓는 영혼의 나라이다.

 

14일 동안의 자전거 투어로 돌아본 티베트의 산하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뚜렷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 아래 따뜻한 마음과 영혼을 갖고 사는 티베트인들이 가슴 한켠에 자리를 틀고 있다. 너무 슬프고 아름다운 가슴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