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살랑살랑 바람 노래에 건들건들 춤추네… 포천 명성산 ‘억새’

피나얀 2006. 10. 19. 21:43

 

출처-[국민일보 2006-10-19 17:56]




명성산 억새가 서럽게 흐느낀다. 새하얀 억새바다가 어깨를 들먹이면 민들레 홀씨를 닮은 억새꽃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가녀린 핏빛 줄기는 애써 울음을 삼킨다. 천 년 전 궁예가 산이 떠나가도록 목놓아 울고 마의태자 신세가 서러워 산도 따라 울었던 곳. 그리고 반세기 전 이 땅의 젊은이들이 비명과 함께 산화했던 그곳. 이제 그날의 아픔과 설움을 기억하는 명성산 억새만 홀로 남아 깊어가는 가을을 슬퍼한다.

 

산 속은 벌써 늦가을이다.

 

아직은 단풍잎보다 초록잎이 많지만 경기도 포천의 명성산 산행로 초입에 자리한 비선폭포는 낙엽비에 흠뻑 젖었다. 매끄러운 피부의 너럭바위를 흘러넘치던 물줄기는 백지장처럼 야위고 옹달샘으로 변한 소(沼)는 빨갛게 물들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진 단풍잎에 뒤덮여 때 이른 만추를 연출한다. 오랜 가을 가뭄 탓이다.

 

하지만 단풍이 곱지 않다고 가을산의 매력이 덜할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산행로와 계곡은 갈색추억을 노래하고 발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커피색 낙엽은 시가 되어 파편처럼 부서진다. 그리고 동심원을 그리며 낙하하는 가랑잎은 산행객들의 가슴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파문을 아로새긴다.

 

용이 날아올랐다는 등룡폭포도 물이 마르기는 마찬가지다. 행여 정적을 깰세라 화강암 폭포를 흘러내리는 물줄기마저 숨소리를 죽인 탓인지 숲속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고즈넉하다.

 

명성산 800m 능선의 동쪽 사면에 펼쳐진 6만평의 광활한 억새밭은 ‘위험(사격중)’이라는 빨간색 삼각형 표지판이 붙어있는 철조망을 따라 올라가면 만난다.

 

억새밭은 순백의 물감으로 채색된 한 폭의 유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른 키보다 높게 자란 억새가 새하얀 꽃을 피운 풍경은 황홀하다 못해 몽환적이다.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억새밭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울긋불긋한 차림의 산행객들이 연출하는 검은 실루엣은 억새밭 능선과 푸른 하늘의 합작품 .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비행음과 폭발음이 명성산을 뒤흔든다. 놀란 억새꽃이 미친 듯 춤을 추고 중무장 헬기가 날아오른 쪽빛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인근 군부대 사격장에서 훈련이 시작됐나보다.

 

서쪽 산자락에 산정호수를 품은 해발 923m의 명성산(鳴聲山)은 글자 그대로 ‘울음의 산’이다.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자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고 해서 명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도 하고,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다 바위산에 올라 엉엉 울었더니 산도 함께 따라 울어 명성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명성산 억새밭은 본래 울창한 삼림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초토화되어 억새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명성산 억새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울음을 삼키며 흐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억새밭 사이로 난 산행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오르면 팔각정 조금 못 미쳐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리 잡은 ‘궁예 약수터’가 나타난다.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마셨던 약수로 표지판에는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적혀 있지만 올해는 예외다.

 

약수터 아래 억새밭에서 만나는 포천구절초의 은은한 향은 명성산 억새산행의 덤. 억새밭 사이에 몇 포기씩 군락을 이룬 포천구절초는 포천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식물로 잎이 코스모스 잎을 닮았다. 억세꽃에 질세라 하얀 꽃을 활짝 피운 포천구절초의 강인한 생명력이 새삼스럽다.

 

명성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산정호수 쪽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에 위치한 팔각정에 서면 억새밭은 물론 계곡 너머 군부대 사격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180도 돌리면 멀리 한탄강 줄기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팔각정에서 보는 명성산은 야누스처럼 두 가지 이미지를 가졌다. 억새밭이 펼쳐지는 동쪽 사면의 부드러운 산자락은 여성적인 반면 산정호수에 면한 서쪽 산자락은 경사가 급한데다 근육처럼 불쑥불쑥 솟은 바위로 인해 남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긴다.

 

저무는 붉은 태양 아래 서 있는 억새는 인생무상이 느껴질 정도로 애달프고 애잔하다. 인생의 모든 것을 비워낸 백발 노인처럼 처량한 억새에서 천 년 전 궁예와 마의태자를 본다. 그리고 붉은 빛을 머금은 억새가 토해내는 금빛 분가루에서 깊어가는 가을 서정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