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아주 오랜만에 새벽바다에 섰습니다

피나얀 2006. 11. 1. 23:20

 

출처-[오마이뉴스 2006-11-01 09:28]



▲ 모슬포항의 새벽, 출항하는 배의 엔진소리가 청년의 숨결처럼 힘차다.
ⓒ2006 김민수
감히 바다를 볼 때마다 그를 닮고 싶다고 소망해 봅니다. 매일매일 바라보던 바다, 단 하루라도 바다를 보지 못하면 미칠 것 같이 그리울 줄 알았는데 바다를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도 그냥저냥 살아지더군요.

바다를 바라보지 못한 시간만큼 좁아진 마음, 바다를 바라보지 못한 시간만큼 얕아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다보니 풍성하게 나누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아가던 삶 대신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가면서도 허덕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주 오랜만에 그냥 바다가 아니라 내가 서고 싶었던 제주바다에 섰습니다. 새벽바다, 그 곳은 이슬 맺힌 풀잎을 보는 듯 신선합니다. 바다의 맛을 폐부 깊이 새기고 싶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그 순간, 그동안 내 안에 들었던 찌끼들이 나와 저 바다로 흩어져 순화되는 것만 같습니다.

남제주군 모슬포항, 아직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하는 배가 있었습니다. 우렁찬 엔진소리, 마치 청년의 힘찬 숨소리를 듣는 듯 했습니다. 힘차다는 것, 그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 만선의 꿈을 안고 먼 바다로 나아가는 길, 아직 파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2006 김민수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갑판 위에 서있는 생면부지의 어부, 그와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가 먼 바다로 나가 잡아오는 것이 어느 날 내가 대하는 식탁에 올라올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상 우리는 매일매일 그런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의 손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입은 옷부터 지하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잡아든 일간지 한 장에도 그 누군가의 땀방울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한 일이 또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가가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선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온전하게 선하지 못할지라도 그저 낙제점은 아닐 정도로, 약점은 있지만 사람이라면 저 정도의 약점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지 하는 정도, 밉상스럽지 않을 만큼, 밉지 않을 만큼의 악함은 가지고 살아가서 조금은 얄밉게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면 될 것 같습니다.

▲ 바다수면과 가장 가까이 날아다니는 새, 비록 작아도 먼 바다를 품고 있는 듯하다.
ⓒ2006 김민수
간혹 떼지어 바다의 수면에 닿을듯 말듯 하면서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는 홀로 새벽을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홀로 있어도 그저 저렇게 자연스럽고, 그 작은 새가 마치 큰 바다를 다 품고 있는 듯 보이는데 과연 나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봅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말로는 하면서도 나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기에 바쁘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내가 선택한 길이면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신을 원망하고, 기도하는 것도 늘 내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남들보다 선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새보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북경반점'이라는 낙서였습니다. 밉상스럽지 않고,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더 팔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들어있는 듯 하여 마치 혈서를 보는 듯 했습니다.

새벽바다는 볼거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밤바다는 밤배가 내뿜는 불빛에 아주 조금만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다 어둠이 물러갈 기운이 보이기 시작하면 자신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막 일어나려는 파도를 잠재웁니다. 밤 사이 품었던 것들을 다 보여주기 전에 파도야 일어나지 말아라 호통을 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새벽바다는 아주 잔잔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 잔잔한 시간이 길지 않아도 그 순간의 고요함과 새벽바다만의 색깔에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 밤배가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처럼 피곤해도 환하게 항으로 돌아온다.
ⓒ2006 김민수
분주한 항구, 오가는 배들마다 희망의 단편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 희망으로 인해 먼 바다로 나가는 배도,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배도 바닷길을 만들며 긴 여운을 남깁니다.

마중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메마른 펌프에 마중물을 붓고는 힘차게 펌프질을 하면 끊임없이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던 우물가, 마지막 사람은 누가 되었든지간에 마중물 한 바가지를 받아놓았습니다. 그것은 배려요, 동시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분주하게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마중물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 세상은 살만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마중물만 있다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중물과 어우러지는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오늘 내가 만나는 그 사람, 그가 마중물이기도 하고 내가 마중물이기도 하고, 그가 펌프질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펌프질을 하기도 하는 사람인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 아침해가 떠오르자 파도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침햇살에 바다는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2006 김민수
일출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오메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찾은 바다인데 잠시라도 황금빛을 보고는 가야 하지 않느냐며 잠시 바다를 물들입니다.

제주의 일출이 얼마나 붉고 아름다운지를 보았었기에 그 정도의 빛에 감동할 수 없습니다.

"진짜가 있는데 가짜로 속이려고요? 진짜를 보여주시죠? 아주 오랜만에 왔는데 서운하네요."
"너 제주에 살 때 그랬잖니? 3박 4일 잠시 여행 왔다가 일출을 보면 4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넌 아직 멀었다."

햇살이 떠오른 후 모슬포항을 걸어 나오는 길, 새벽바다의 내음이 다시 한 번 바람을 타고 내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옵니다. 아, 이런 느낌을 언제다시 느낄 수 있을까?

아주 오랜만에 새벽바다에 섰습니다. 매일보다는 서운하지만 오랜만에가 주는 맛도 참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자연과 벗하여 살아가다 자연을 닮은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 1, 2>, <희망 우체통>, <달팽이걸음으로 제주를 보다>등의 책을 썼으며 작은 것, 못생긴 것, 느린 것, 단순한 것, 낮은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