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경향신문 2006-11-03 16:21]
그러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며 그 내용을 증거할 만한 바위나 나무와 같은 자연물이나 모티프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는 언제나 지난 시간으로부터 시작해 현재로 이어진다. 곧, ‘옛날에’로 시작해 ‘지금도’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러 1995년 늦가을부터 96년 봄이 오기까지의 농한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동강을 드나들었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곁을 주는가 싶으면 어른들마다 붙들고 조르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또 하나의 전설이 되고 만 그들의 삶의 현장을 서성이며 현실이 전설이 되어가는 과정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누구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위해 핑계 삼아 영정 사진을 찍어드리기도 하며 들은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옛날에’로 시작했으며 ‘지금은’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이야기의 끝이 얼버무려지는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 무렵은 이미 동강댐 건설의 가부를 두고 정부와 환경단체, 그리고 주민들 간의 삼자대립 각이 첨예하게 곤두서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변화의 가장 중심은 길이었다. 정선읍으로부터 강기슭을 따라 뼝대를 바람막이로 길이 생겨난 것은 불과 20여년 전인 83년이다. 가탄마을에 사는 이강호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에는 담배농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로 ‘황새연초’라고 불렀던 담뱃잎을 말려서 가수리에서 너투니재를 넘어 정선의 북실리로 30리 길을 걸어야 했단다.
왕복에 하루가 걸렸지만 새벽밥을 집에서 먹고 또 김치로 싼 주먹밥을 가지고 넘어 갔다 와야 했단다. 그것도 싫으면 강냉이밥을 해 가지고 짐 꾸러미 위에 올려서 길을 떠났는데 그이 말로는 강냉이밥은 요사이 개를 줘도 안 먹을 만큼 고약한 것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담배를 내다 팔 때는 겨울 초입이어서 때로는 길이 얼기도 하고 눈보라를 맞기도 했는데 꽁꽁 얼어 터진 그 밥을 먹으려고 시내에서 냄비를 빌려서 맨 물을 끓여 데워 먹어야 했다니 가슴 저미는 이야기에 그이도 나도 연신 소주잔을 들었다 놨다 해야만 했었다.
그처럼 이곳에는 강물이 줄어드는 이맘때가 되면 여름과는 또 다른 강의 모습을 내놓곤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다리이다. 깊은 산골 강마을이었으니 튼튼한 다리 하나 없이 배로 건너 다니는 불편함이란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길이 이어지지 않는 강 건너에 사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대로 된 다리 하나 놓였으면 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니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다리를 놓곤 했는데 동강에 놓이던 것은 ‘섶다리’이다. 내가 눈으로 본 것만도 귤암리, 가수리, 운치리, 덕천리 모두 네 곳에 섶다리가 있었으며 귤암리와 가수리의 그것은 어느 해부터 모습은 섶다리이지만 위 상판을 나무판자를 깐 널다리로 바뀌었다.
그나마 운치리 수동마을과 번평마을을 잇는 다리와 덕천리의 연포마을로 건너가는 섶다리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방식으로 남아 있었지만 99년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가을걷이를 마친 마을 주민들은 그 전날부터 다리를 놓을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다듬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주 흥미로운 것은 길이 지나가는 번평마을과 강 건너인 수동마을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었으며 그들 모두 일을 정확하게 나누어서 하고 있었다. 가령 ‘다릿발’이라고 불리는 나무로 만든 교각을 12개를 세워야 했는데 각 마을이 6개씩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머지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쪽에 세운 다릿발을 가로로 서로 붙잡아주는 ‘머기미’도 또 다릿발과 다릿발을 세로로 길게 이어주는 긴 나무인 ‘널래’도 똑같이 나누었으며 널래 위에 상판으로 놓이는 솔가지인 ‘소깝’이나 소깝을 눌러주며 동시에 사람이 다니기 좋게 깔아 놓는 흙인 ‘저새’ 또한 어느 마을에 치우침이 없이 나누는 것이었다.
더구나 다리를 놓는 일은 더욱 흥미로웠다. 어느 한 쪽에서 다리를 놓아 오는 것이 아니라 각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강기슭에서 따로 시작해 가운데에서 만나 서로 이어주는 것이었다.
그날은 각 마을마다 10명 남짓한 남정네들이 일을 했으며 여인네들은 수동마을 강기슭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수로 점심을 내놓았으며 고기를 구워 추위를 달래려 들이키는 소주의 안주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윽고 뚝딱, 이른 아침부터 해거름까지 뛰어 다니더니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각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른들을 앞세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마을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것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두어군데마저 손을 보고 나서 모든 일이 끝났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것인 탓인가. 나는 그만 그 다리에 매료되고 말았었다.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던 것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모두 보고 난 다음에 느끼는 것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마을 주민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을 문화의 한 형태라고 이해하지 못하거나 도시의 문화가 산골의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묘한 순위 매기기에 급급해 껴안지 못하는 우리들의 잘못인 것이다.
문화라는 것이 근사한 미술관이나 음악당에만 있거나 작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해보라. 섶다리를 놓는 일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우리들의 미풍양속인 두레나 향약, 그리고 어른 공경과 같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일이다.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유형의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그것과 함께 무형인 우리들 자신도 황폐해지고 달라지는 것이 무서운 일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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