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억새의 춤바람

피나얀 2006. 11. 6. 20:47

 

출처-[중앙일보 2006-11-03 06:33]




경남 창녕군 화왕산(火旺山.757m) 정상부의 억새 벌판에 갈 때는 이른 새벽 동 트기 전부터 산에 올라야 한다. 낙동강 물기운으로 산허리는 물론 정상의 하늘마저 안개에 휩싸여 있는 시간에 정상을 밟는 것이 좋다.

 

산너머 능선 위로 해가 솟고, 이어 새벽 햇살이 안개 사이를 뚫고 스며들 때쯤 안개가 스르르 풀린다. 억새 군락이 그 덩치를 드러내고, 억새꽃에 맺힌 이슬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이때야말로 하루 중 억새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아침 햇살이 산중의 공기를 데워 정상을 향해 골바람이 불면 억새가 흔들린다. 저 몸짓은 화려한 군무(群舞)이며, 한 맺힌 기다림이고 동시에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다. 그러니 억새를 보고 많은 시인묵객이 마음을 진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다들 느낌은 달랐나 보다.

 

억새를 보고 한숨 짓는 이가 제일 많았을 게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박영호씨가 가사를 짓고, 작곡가 손목인씨가 곡을 붙여 고복수가 불렀던 노래 '짝사랑'의 한 구절. 노래 때문에 '으악새'를 가을새의 일종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으악새는 억새를 일컫는 경기도 사투리다.

 

도종화 시인은 억새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머니 / 억새풀밖에 마음 둘 데가 없습니다/ 억새들도 이젠 그런 내 맘을 아는지 / 잔잔한 가을 햇살을 따서/ 하나씩 들판에 뿌리며 내 뒤를 따라오거나/ 고갯마루에 먼저 와 여린 손을 흔듭니다'('억새' 중에서).

 

그는 억새 군락에서 '억새풀처럼 평생을 잔잔한 몸짓으로 사신 어머니'를 만났다. '어릴 적 손 한번 베인 다음 언제나 너를 멀리만 해왔다'던 김종구 시인은 '이제는 너는 나를 베지 않는다 / 내 피가 묻은 네가 따뜻하다'('억새에게' 중)고 읊는다.

 

 

억새를 보러 올 요량이라면 그 밭에서 능히 나절을 보낼 만하다. 스멀스멀 얼굴에 와 닿는 억새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누구라도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게다. 정상부에는 둘레 2.6㎞의 화왕산성이 둘러쳐 있다. 가야국 때 쌓은 돌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는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분지형 정상부를 제외하면 산비탈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과연 천혜의 요새라 할 만하다. 혹자는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이 이 성에서 배화진(背火陣)을 치고 싸웠다고도 한다. 성 내부의 억새 군락에 불을 피워 놓고 "이 성이 함락되면 우리는 저 불 속으로 들어간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는 설이다.

 

어쨌든 이름에 불 화(火)자가 들어간 것에서 보듯 화왕산은 불과 인연이 깊다. 창녕군에서는 3년마다 음력 정월대보름 날 화왕산 억새에 불을 놓는다. 화왕산에 불이 나야 풍년이 깃들고 고을이 평안하다는 전설에 따른 행사란다. 억새를 빼놓고는 나무가 거의 없어 산불로 번질 위험이 적은 덕에 가능한 일이다.

 

하얗게 마른 억새 군락에 붙은 불은 순식간에 번져가 수십m 위 하늘로 치솟는다. 이 장관을 보러 오는 인파가 5만 명이 넘어 행사 때면 산 정상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화왕산의 억새는 불 지른 해에 가장 훌륭하다는데 올해가 그에 속한다. 지난 2월 불 지른 뒤 자라난 억새꽃이 가을을 익히고 있다.

 

 

◆ 여행정보

 

흔히 화왕산 산행은 창녕읍내 창녕여고 쪽 자하곡 매표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호젓한 산행을 원한다면 창녕읍 옥천리 쪽의 옥천 매표소(055-530-2498) 편이 낫다. 옥천매표소~관룡사~용선대~관룡산 정상~청간재~화왕산성 동문~화왕산 정상 코스에 두 시간 남짓 소요.

 

관룡사는 통일신라 때 지어진 절인데, 일주문으로 연결되는 돌문(사진)이 운치 있다. 용선대(龍船臺)는 산중턱의 평평한 바위인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석불로 유명하다. 대학 입시 앞둔 자녀를 둔 불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데, 영남권에서 "대구 팔공산 갓바위만큼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단다.

 

■옥천리 매표소 가는 길=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 나들목→창녕읍 오리정→ 계성→ 옥천 (18km), 또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영산 나들목→영산면소재지→계성→옥천(1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