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합르페르 2006-11-09 11:32]
철학자 플라톤은 지진으로 가라앉은 전설의 유토피아인 아틀란티스가 해수면 아래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라 기록했다. 금은보화로 가득한 보물섬이 실존한다는 전설은 대항해시대 모험가들이 길을 나선 원동력이었다.
무역과 전쟁으로 크게 번영했었다는 이 섬에 대한 환상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산토리니에 입성했을 때 만약 아틀란티스가 현존한다면, 이곳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아름다운 산토리니 섬에서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가이드를 맡아주기를 바랐다. 영혼이 순수한 그라면, 일상생활에서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규율에 맞춰 살아야 하는 고달픈 인생에게 섬을 만끽하는 법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정신을 육체보다 상위에 두어야 하는 수많은 관광객에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건넨다. "당신 가방 안에 있는 가이드북에다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죠."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처럼 자유롭게 살아가야 한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거려도,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고 싶다면 벌컥 들이켜야 한다. 현미경을 부숴버리면 다음부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산토리니에서는 조르바처럼 충실하게 욕망을 따라서 행동하면 그만이다. 이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환상적인 경치, 그리고 그 속에서 흐느적대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려면 조르바가 돼야 한다. 본능을 채우고 있는 족쇄를 풀어버려야 한다. 머리로 여행하고픈 자는 피레우스(Piraeus)에서 산토리니로 오는 배에 승선하지 말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야 한다.
청량, 순수, 깨끗함의 삼위일체
산토리니로 가는 여객선의 갑판 위는 가히 난장판이라 할 만했다. 출항할 때의 설렘도 잠시, 간이의자에 기대 널브러져 있는 길손이 태반이었다. 오전 7시 25분에 떠나는 페리에 타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을 테니 다들 피곤할 터였다.
나머지는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거나 카드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선상의 정경은 이따금 눈에 스쳤다 사라지는 에게 해의 섬들과 조화를 이뤄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군청 빛 바다 위로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 파로스(Paros)와 낙소스(Naxos)에 잠시 정박했던 배가 마지막 목적지인 산토리니로 출발했다. 한순간 선잠에서 깨어난 인파가 갑판의 그늘에 숨어 있다 순식간에 뛰쳐나와 탄성을 내질렀다. 산토리니였다.
이곳을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감동을 주는 것은 없었다. 콘서트홀에 가수가 들어서기라도 한 듯 모두 섬이 보이는 쪽 난간에 찰싹 붙어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티니오스 항구에 도착하니 호객행위를 하러 나온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객실을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룸(Room)?"이라는 한마디를 건넸다.
항구에서 받은 산토리니의 첫 느낌은 '예쁘다'가 아니라 햇볕이 '따갑다'는 것이었다. 따뜻하지 않고 뜨거웠다. 팔에서 흐르는 땀을 말려버릴 만큼 태양이 내뿜는 광선은 강렬했다.
처음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빛은 산토리니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햇빛을 잔뜩 머금은 하얀 집은 눈을 피곤하게 했고, 일을 힘들게 했다. 색의 찰나를 그려낸 인상파 화가들이 산토리니에 살았다면 아마도 산토리니의 화려한 빛깔에 눌려 그림 그리는 작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부시다'는 말은 이곳에 가장 적합했다. 경치가 아름다워서 그러했고, 실제로 눈을 뜨지 못해서 그러했다. 하얗다는 뜻의 한자 '백(白)'이 해(日)와 이웃사촌 지간인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산토리니는 제주도나 울릉도처럼 화산섬이다. 항구에서부터 뒹굴고 있는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이 증거다. 첫 행선지를 산토리니의 마을 가운데 가장 아기자기하고 석양이 멋있다는 '이아(Ia)'로 정했다. 도로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아는 사람이 살고 있는 촌락이라기보다 '테마파크' 같다. 사진에서 너무나 많이 봐왔던 지붕만 파란색이고 나머지는 하얀색으로 칠해진 교회가 마을의 중심부다. 주위 벽도 모두 흰색이고, 바닥은 대리석이어서 너무나 깨끗하게 느껴졌다.
좁은 골목에는 산토리니의 가옥을 축소한 깜찍한 기념품, 티셔츠, 하얀 자수 제품,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미술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같은 느낌이었다.
이아의 백미는 해넘이다. 마을에서 한번 놀란 관광객은 서쪽 끝에서 숨이 막힐 듯한 비경을 경험하게 된다. 해질녘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빨간 불덩어리가 바다 아래로 침잠하는 절정의 순간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태양과 바다가 벌이는 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은 주연 배우 한 명이 퇴장했을 때 환호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일몰이야 어디에서 보든 장관이지만, 이아에서는 특별하다. 단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흥분이 된다. 광화문에서 길거리 응원을 하던 도중에 한국이 득점했을 때의 에너지와 비슷하다고 할까.
산봉우리에 눈이 내린 듯한 모습은 피라(Fira)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아보다 더 복잡하고 사치스러운 피라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큰 동네다. 아테네보다 더 번화한 이곳은 철저히 상업적인 지구지만, 억지로 물건을 사도록 잡아끌지는 않는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피라는 더욱 요염하게 변한다. 상점은 자정까지 문을 열고 그리스의 대중식당인 타베르나와 바는 광란의 밤을 보내려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환상적인 경치와 분위기는 인간의 본성을 내던지게 만든다.
그래도 산토리니는 청량하고 순수한 섬이다. 가옥들이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음에도 상쾌하다는 느낌을 준다. 조르바의 말처럼 어차피 산토리니에서는 두뇌가 필요하지 않다.
일탈을 원하는 사람이든, 휴식을 원하는 사람이든 산토리니가 해답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탐닉한다. 그래서 잊었던 자아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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