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북촌 문화 기행① 도심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피나얀 2007. 2. 2. 16:42

 

출처-[연합르페르 2007-02-02 09:32]




서울 북촌(北村)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오래된 마을이다. 조선조 개국 이래 면면히 이어온 서울 600년의 숨결이 보존된 곳이다. 북악산 자락 아래 배치된 두 궁궐을 날개 삼아 900여 채의 한옥이 예스러운 풍경을 이룬다. 새벽 어스름이 흩어질 무렵,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옛 대갓집 양반네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청계천 북쪽 마을에서 이름 유래

 

북촌(北村)은 이름 그대로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사대문 안에서 종로와 청계천의 위쪽에 해당돼 그 지명이 붙었다.

 

옛 한성 지도를 보면 백악과 응봉을 잇는 능선 아래 골짜기의 물길들이 청계천을 향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북악에 경복궁, 응봉에 창덕궁이 들어섰고 그 사이의 물길을 중심으로 민가가 들어섰다.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는 중학천, 지금은 복개되어 삼청동 길이 된 지점에서부터 헌법재판소 위쪽에서 운현궁 앞으로 흐르던 가회동 물길까지가 여기에 해당됐다.

 

물길이 여러 갈래니 북촌은 지하수가 풍부할 뿐더러 물 빠짐 또한 좋았다. 능선이 남쪽에 면(面)하며 낮아지는 지형이라 겨울에도 볕이 잘 들어 따뜻했다. 도성의 어느 곳보다 지리적 장점이 많아 힘깨나 쓴다는 세도가들이 모여들었다. 왕실의 종친과 육조에 재직하던 벼슬아치의 저택, 그들이 부리던 하인이 기거하는 크고 작은 집들이 세워졌다. 권문세가들은 북촌에 집거함으로써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보를 교환하고 유대를 다질 수 있었다.

 

북촌의 경제력과 문화수준은 청계천 건너 남산 기슭, 하급관리들과 가난한 선비인 딸깍발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남촌(南村)과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황헌의 매천야록(梅川野錄)을 보면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살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산다’고 기록돼 있다. 북촌은 송시열에서 북학파로 이어지며 조선을 이끌어간 노론의 세거지였다. 요즘 기준으로 말하자면 ‘조선의 청담동’이었던 셈이다.


◆북촌은 조선시대의 청담동

 

수세기 동안 훼손되지 않던 북촌의 영화(榮華)는 조선조가 문을 닫으면서 퇴색기에 접어든다. 왕조가 무너지자 북촌에 거주하던 세도가들 역시 하나 둘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그중 일부는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아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지만, 충절을 지킨 명문가의 후예들은 대부분 칩거했다.

 

물론 칩거생활이 한가롭고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관직을 잃자 북촌 주인들의 경제적 기반은 점차 약화되었다. 더 이상 아흔 아홉 칸 저택과 대규모의 식솔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우선 행랑채의 하인과 식객을 내보내야했고, 이후에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북촌 앞 우정국(郵政局) 주변에 골동품 매매 상점들이 생겨나 지금 인사동의 기원이 되었다.

 

식민지배가 길어지면서 북촌의 웅장한 저택들은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1930년대를 전후해 대저택의 상당수가 소규모 한옥으로 자리바꿈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헐리고 수천 평 부지는 잘게 쪼개져 팔려 나갔다. 각각 5천여 평, 2천700여 평에 이르던 가회동 31번지, 26번지도 이 시기에 50여 평의 소규모 필지로 분할되었다.

 

식민지 시절, 건설회사에 의해 구획돼 조성된 ‘도심 주거형 한옥’은 오늘날까지 북촌 한옥의 주류를 이룬다. 이전의 크고 웅장한 저택들은 백두산, 설악산 등지에서 가져온 고급자재와 대목(大木)에 의해 지어지고 건물 배치가 성글었던 데 반해, 도심 주거형 한옥은 공산품 찍어내듯 대량으로 세워져 빼곡히 북촌을 메워나갔다.

 

북촌 한옥의 변화는 경성(京城)으로 밀려드는 인구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도시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새 한옥은 최대한의 공간 활용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대개 30평 안팎의 부지에 ㄷ자 형태로 기와지붕을 올렸다. 마당을 갖는 전통 배치를 유지하면서 이웃끼리 서로 처마를 잇대고 담장을 공유했다. 솟을대문과 드넓은 중정(中庭-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이 사라진 자리에는 키 낮은 대문과 좁은 마당 그리고 펌프시설이 놓여졌다. 아흔 아홉 칸 기와집은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 등 몇 채만이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