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경향신문 2007-02-15 09:45]
이미 막배가 떠난 후였다. 섬은 멀리 있었다. 걸어서 갈 수 없기에 섬은 아주 멀다. 섬을 가까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배는 바다로 나아간다. 이렇게 인간은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떠나지 못한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 그래, 이건 어쩌면 여기서 하루 쉬어가라는 바다의 선물일 수도 있다.
하조도로 들어가는 진도의 팽목항에서 서성거리다가, 가까운 곳에서 하루 묵을 곳을 찾았다. 허름한 여관방에 짐을 풀고 다시 방에서 나와, 선착장 근처의 선술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배가 사람 그리운 것처럼 고팠다. 마을 사람들은 두런거리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그래, 그는 얼마 전 삶의 막배를 타고 이승을 떠났구나. 아직까지 남겨져 있는 그의 문자 메시지를 지웠다. 다행히 음성 메시지는 없었다. 이럴 때는 박인환의 시를 읽어야 한다. 등대로….
다음날 아침, 첫 배를 타고 하조도로 들어갔다. 하조도에서는 구렁이를 잡지 않는다. 어쩌다 구렁이가 집으로 들어오면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내쫓을 뿐이다. 이 섬에 전해 내려오는 옛 이야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에, 한 어부가 집에 들어온 구렁이를 잡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던 중 그물에 많은 고기가 들었다. 기쁜 마음에 그물을 올리니 고기들 사이에 어부가 죽였던 구렁이와 같은 구렁이들이 여러 마리 섞여 있었다. 화들짝 놀라자 구렁이들이 어부에게 달려들었다. 어부는 겨우 목숨을 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부터는 다른 어부들 역시 구렁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목포해양수산청 하조도 등대의 주소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 1-1번지이다. 진도의 팽목항에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조도 6군도 중에서 대표적인 절경은 역시 관매도이다. 해수욕장이 유명하다.
하조도는 관매도의 북쪽에 있다. 섬은 동서의 길이가 약 7㎞이고, 남북의 폭은 약 2.8㎞이다. 정상에는 돈대산이 있다. 섬의 이름이 하조도인 것은 마치 새떼처럼 많은 섬들이 가까운 바다에 산재해 있어서이다.
조도는 새들의 섬이다. 섬은 바닷새들에게는 여행의 간이역이었다. 바다를 건너다가 잠시 날개를 접을 수 있는 곳이 섬이다. 근처 섬의 이름 중에는 새들의 분뇨로 만들어진 섬이라는 뜻의 칠발도라는 섬도 있다. 얼마나 새가 많았으면 저런 이름으로 섬이 탄생한 것인가. 새들은 먼 성지로 떠나는 성자와 같이 보이기도 한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 길을 밟고 가는 것 같은 희망을 인간은 품고 살아야 하리라.
등대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어디선가 파이프 오르간이 울리면서 그레고리안 성가라도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세의 수도원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다.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성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대로 이어지는 육중한 돌담이 주는 느낌, 다른 등대에 비해 허름한 관사 역시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온 품격이 있었다.
등대장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마침 등대장의 부인이 와 있어서 먼 길을 온 손님에게 붉은 과일을 깎아 내주었다. 잠시 숙소에서 여담을 나누고, 등대장을 따라 등대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를 찾았다. 기슭에 올라 등대를 내려다보았다. 등대의 배경에는 바다에 박혀 있는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낮의 등대는 섬을 보고 있었다. 섬에서 날아오는 새들을 보고 있었다. 밤이 되면 등대는 바다를 본다. 등대가 어둠을 만나면 등대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그래, 낮에 등대는 새를 보고, 섬을 보고, 더 먼 곳을 본다.
등대의 구조는 백원형 콘트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 3층 구조의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외부에도 등롱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등탑의 높이는 12m이며, 평균해수면으로부터 등고가 48m이다. 등대장의 안내로 등탑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철계단이 나선형으로 등롱까지 이어져 있었다. 등롱 쪽으로 작은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등롱의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보았다.
“좀더 먼 바다에 있는 섬으로 가보세요. 이곳은 너무 육지와 가까워요.”
등대원이 말했다. 나는 먼 곳도 다녀왔다고 했다. 어청도, 거문도, 울릉도. 우리나라의 먼 바다에 있는 섬들과 등대였다. 섬에 사는 등대원은 외로워 보였다. 왜 나에게 더 먼 곳으로 가라고 하는 것일까? 그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섬들을 보았다. 섬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등대처럼 환했다.
등대원들은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일까? 등대가 항상 거기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등대원들 역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축구장의 골대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이 무섭다면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정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잠시 다녀가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적막함 속에서 등대가 신호를 보내고, 다가오는 배도 신호를 보낸다. 약속이고, 질서이다.
등대에 귀를 대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았다. 단단한 콘크리트 구조물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대신 끼익끼익 울고 지나가는 바닷새 소리가 들려왔다. 등대에서 막 부화한 새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돌아보니. 섬, 섬, 섬.
하조도 등대는 근처 154개의 섬(유인 35개, 무인 119개) 사이에 있는 섬이었다. 조도는 등대를 품고 있음으로 둥지와 같은 섬이 되었다. 등롱에서 내려와 등대 주변을 산책했다. 바다 쪽으로 벤치가 있다. 마침 가족과 함께 온 소녀가 앉아 있었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소녀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바로 저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사람의 등대라는 것을. 소녀는 빛나는 존재이다. 그 빛이 다른 빛을 만날 것이다.
등대는 어둠만을 만난다. 어둠 속에 길을 낸다. 그 길을 밟고 다가오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배는 등대를 지나쳐 간다. 등대는 목적지 바로 앞에 서 있는 대문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파도가 그 길을 밟고 올라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바다가 끝나는 곳에 육지가 시작되듯이 인간의 죽음도 그러한 것일까?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일까?
1909년에 처음 불을 밝히고 근 100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하조도 등대, 그 등대 아래서 나는 새의 눈으로 보았다. 새의 몸에 내 마음을 실었다. 마음엔 무게가 없다. 관념적인 마음의 눈이 새를 빌려 현실이 된다. 너무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새처럼 보라, 멀리 보자 멀리 보자. 내 눈빛이 떨어지는 그 가장자리가 삶의 경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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