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경향신문 2007-02-22 09:42]
“여기서는 잠시 내립시다. 여기가 백도요.”
온종일 수많은 남해의 무인도를 떠돌다가 백도에 닿았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 섬은 이토록 맑고 아름다운 것인가? 백도에 내리자마자 내 눈길은 이 무인도의 등대를 찾았다. 섬의 정상에 있는 백도 등대가 이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대로 올라가는 내내 발길은 주위의 풍경 때문에 저절로 멈추었다.
백도는 관광객의 상륙이 금지되어 있는 섬이다. 그들은 유람선을 타고 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한다. 백도는 바다가 만든 작품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남해의 무인등대를 점검하는 등대 점검원들의 덕이었다.
백도는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 떨어진 해상에 있는 39개의 무인군도 중 한 섬이다. 상백도와 하백도로 무리지어 있는 작은 섬들이다. 섬에 있는 매바위, 서방바위, 각시바위, 형제바위, 석불바위 등 바위들은 모두 오래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등대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백도의 전설을 들었다.
“태초에 옥황상제 아들이 이곳으로 쫓겨났다. 상제의 아들은 이곳에서 용왕의 딸을 만나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옥황상제는 수년이 지나자 아들이 보고싶어 신하 100명을 내려보냈으나, 신하들마저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아들과 신하들을 모두 돌로 변하게 하였다. 그들이 크고 작은 섬이 되어 백도가 되었다.”
섬의 이름은 섬이 100개 정도가 된다하여 백도(百島)라고 했는데, 한 개가 모자라 일백 자의 한 획을 지워 흰백(白)자가 되어 백도(白島)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다.
인간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백도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를 비롯해서 30여종 조류들과 풍란, 석곡, 눈향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모두 353종의 식물분포가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연중 평균 16.3도의 바다온도 영향으로 바닷속에는 큰 붉은 산호, 꽃 산호, 해면 등 동물 126종, 식물 44종 등 모두 170여종의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바닷속이 더 아름답다는 말도 있다.
등대 아래서 잠시 기도를 하듯이 바다를 보았다. 아무래도 이 무인도에서는 그대에게 편지를 써야 할 것 같다.
바다는 모르는 사람의 마음 같습니다.
바다로 나아가 돌아오지 않은 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새들이 대답합니다. 어딘가에서 섬이 되었다고. 섬에 살고 있는 새들은 날개를 잠시 접었습니다. 가마우지라고 불리는 새입니다. 크고 뚱뚱합니다. 멀리 날아가기 위해 많이 먹어야 되는 그런 새입니다. 갈 곳까지 날아간다면 다시 앙상해질 것입니다.
배를 타고 나아가다 보면 ‘배는 움직이는 섬이고, 섬은 움직이지 않는 배’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배가 섬으로 다가갈 때 찰나처럼 스치는 생각입니다. 섬이 배를 반기고, 배가 섬을 반가워합니다. 섬이 섬을 만나는 것이고, 배가 배를 만나는 거지요.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만약, 섬이 배를 만나듯이 한다면 사소한 오해나 미움은 없을 것입니다.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면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진실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등대는 그런 마음을 아는 것 같습니다.
섬의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지나가는 배만 바라보는 등대의 눈동자는 저렇게 커다란 그리움으로 밝습니다. 사람은 그 등대의 눈을 보고 안심하고, 육지로 다가갑니다. 등대에 올라 바다를 보면 지나가는 배가 선명합니다. 등대에 서면 잠시 등대가 되는 것인가요?
남해 무인도 백도는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조형물이라는 것이 자연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손이 돌을 부드럽게 만들어 조각조각 붙여놓은 듯한 섬입니다.
무인등대로 오르는 길에 있는 매바위는 막 먹이를 쪼려는 순간 굳어져 바위가 된 것 같습니다. 전설이나 신화는 이런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이 무인도를 떠나는 순간 매바위는 새가 되어 다시 날아오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다가 매바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바다를 바라봅니다.
사실 지금은 첨단 지리정보시스템이 있어서 등대가 옛 시절만큼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항해사가 설명해주는 대로 컴퓨터의 화면을 바라보면 배가 나아갈 길은 정확하게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가기만 하면 무사히 육지에 닿습니다.
바닷길을 잡아주는 등대의 불빛보다는 인공위성에서 쏘아주는 정확한 바닷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어디에 암초가 있고, 어떻게 부두로 접근하는지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사선으로 그어져 있습니다. 배는 그 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왜 등대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비상시, 즉 배의 기기가 작동이 되지 않거나, 급격한 기상변화로 배가 위험한 지경에 처했을 때 육안으로 등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그리고 막연한 해로의 표지선보다는 눈으로 등대를 확인하는 순간 선원이나 어부들이 느끼는 마음의 안도감입니다.
‘아! 이제 육지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오랜 시간 그대를 기다리다가 그대와 만나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늙은 뱃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젊은 시절 외항선을 타고 8개월 정도를 바다 위에서만 지낸 적이 있답니다. 그리고 등대를 보았답니다.
“등대 불빛을 보는 순간 흙냄새가 났어.”
등대의 불빛과 함께 육지의 흙냄새가 맡아지는 것입니다. 한두달 바다 위에 떠 있다고 맡아지는 그런 냄새가 아니라는 거지요.
“바다 위에서 두세달 지내면 무력증이 와, 밥상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어. 숟가락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어. 그저 무력해지는 거지. 물 위에서 오래 지내면 아마 몸이 저절로 흙을 그리워하나봐, 그때 젊은 시절 말이야. 등대 불빛과 함께 물씬 풍겨오던 흙냄새, 그건 이 나이가 되도록 겪었던 세상의 어떤 희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어.”
알고 있나요. 저에게 그대는 흙냄새입니다. 무인등대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은 멀리 있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저의 눈빛입니다. 바다의 남풍을 타고 봄이 올라갑니다. 마음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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