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마드리드 공항에서 초콜릿을 삼키며 울다

피나얀 2007. 3. 1. 19:41

 

출처-[한겨레 2007-03-01 17:36]




이슬람 국가가 아닌 스페인을 이슬람 순례기에 포함시킨 이유는 스페인이 가진 이슬람과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었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스페인은 거의 800년 동안 이슬람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다. 711년 북 아프리카 탄지어의 무슬림 지도자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m Ziyad)가 1만여 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스페인의 지브랄타에 내린 뒤 1492년 그라나다의 마지막 무슬림 왕국이 가톨릭 왕에 의해 몰락할 때까지 781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영향권 아래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평화롭게 몇백년 동안 공존했던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가서 그들의 평화로운 공존의 비밀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에게 과학, 수학, 의학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수준높게 발전시켜 가르쳐 주면서 ‘신과 함께하는 문예부흥’을 일으켰다는 이슬람 선조들의 찬란했던 문화적 흔적을 살펴보고 싶었다.

 

호텔서 좀도둑으로 몰리고 비행기를 못타게 돼 항의하자
“당신을 믿지않아” 싸늘한 답변…부츠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마침 아셈(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젊은이들과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초대해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토론하는 콘퍼런스에 나를 강사로 초대했기 때문에 터키 다음의 두 번째 이슬람 평화순례지로 스페인에 가게 되었다. 2004년 3월 11일에 있었던 마드리드 지하철 폭파사건은 192명의 인명을 빼앗아 갔고, 이것은 스페인이 이슬람과의 관계를 다시 숙고하게 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알 카에다와 관련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스페인의 이라크 전 참가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저지른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금 현대 그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재판 과정은 북아프리카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무슬림 이민자와 불법 체류자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스페인 정부에게 스페인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과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들과 함께, 정확하게 말하면 소들에게 쫒기면서 달리는 축제로 유명한 바스크 지역의 팜플로나에서 열린 아셈 청년회의는 이제는 종교가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다시 국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 핵심적인 공적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었다.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로 일하고 있는 아시아와 유럽의 젊은이들과의 진지한 대화와 열띤 토론을 통해 다시 한번 사람을 죽이는 종교와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어떤 것인지 종교의 세계속에서의 복잡한 역할에 대해 같이 공부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아셈 콘퍼런스를 마치고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로 향하면서 스페인의 평범한 공업도시를 문화의 도시로 변신시켰다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을 방문했고, 마드리드로 내려와 벨라케즈, 고야, 엘 그레꼬로부터 미로, 달리, 피카소에 이르는 많은 화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여러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스페인 미술관들의 컬렉션과 전시능력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뭔가 나를 무척 불편하게 하는 스페인의 기운에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이것은 무척 표현하기 힘든 ‘기운’의 문제인데 터키에서 스페인으로 옮겨오면서 마치 온대지역에서 한대지역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외로워지고 이 세상은 정겨운 우마(공동체)가 아니고 정글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느낌에 대해 왜 그런가 하고 명상을 하다가 마드리드를 떠나는 날 이 느낌들을 현실화 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날 나는 뮤지엄에서 돌아오다가 소매치기를 당하면서 많은 걸 잃어버렸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면서 호텔 여주인에 의해 좀도둑으로 몰렸다. 어찌어찌 그 황당함을 모면하고 그라나다로 가기 위해 공항엘 갔는데 공항 카운터의 직원은 자신의 실수로 나를 내가 타야하는 비행기에 태우지 않았으면서도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책임자를 불러달라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직원은 한명도 없었다. 그들의 과도한 무책임한 태도와 불친절함은 드디어 내 안의 ‘전사’를 깨어나게 했고 나는 ‘어글리 어메리칸’(ugly American)처럼 그들을 향해 영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굴면 당장 당신들과 항공사를 고소하겠다.” 이 “고소”라는 말의 효력은 즉각적이었다. 그들은 당장 책임자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즉시 나타났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책임자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나는 당신을 믿지 않는다!” (I don't believe you!) 상황이 이 정도면 배상을 요구하거나 같이 의논해서 해결책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선심쓰듯 내주는 3시간 후의 비행기 티켓을 받아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이 황당한 사건들을 소화하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터키에선 환대 받았는데 여기 이런 대접을 받다니…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우리 딸은 잘 이겨낼거야!”


공항 상점에 가서 초콜릿 한 상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공항 구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스크림을 단숨에 다 먹고 초콜릿 상자를 뜯으면서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에서 톰 행크스가 벤치에 앉아 초콜릿을 먹으며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큐가 75밖에 안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해라. 너는 그냥 다를 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냥 터키에서 스페인으로 잠깐 위치를 옮겼을 뿐이다.

 

나는 똑같은 현경인데 왜 이렇게 다른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일까? 그곳에서 3시간 동안 앉아 온갖 정치, 경제, 역사, 종교, 인종, 젠더의 분석을 하며 초콜릿 한 통을 다 먹었다. 이성적인 분석들은 내 마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공항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그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딸은 정말 예뻐.

 

우리 딸은 무슨 일이든 잘 할 수 있고 잘 이겨나갈 거야.” 내가 여섯 살 때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초콜릿을 삼키며 울었다. 내 먼지 가득한 까만 부츠 위로 떨어진 눈물 방울이 내게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주며 나를 위로했다.

 

나중에서야 스페인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풀이를 들을 수 있었다.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공동체성을 점차 잃어가고 개인주의가 세를 불리고 있다는 점, 항공사 역시 오랫동안 국유화 되었던 탓에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거나 고객 서비스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원인을 뚜렷이 말하긴 힘들지만 인종적 편견과 동양 여성에 대한 비하가 나에게 불쾌한 경험을 일으킨 까닭이 아닌가 미뤄 짐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