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타프롬 사원의 '스펑나무 잔혹사'

피나얀 2007. 3. 1. 19:30

 

출처-[오마이뉴스 2007-03-01 12:00]



▲ 아름드리 나무에 쓸리며 다시 정글의 일부가 돼 가는 타프롬 사원의 모습.
ⓒ2007 서부원

우람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 찬 정글 숲 속에 버려진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버려진 사원이 있습니다. 멀쩡하던 집도 살던 주인이 떠나버리면 채 한두 달이 못 가 흉물스럽게 변하듯, 한때는 수백 명의 수도승들이 머물렀다는 거대한 석조 사원 역시 채 오백 년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졌습니다.

사원을 세울 당시에는 엄청난 인력과 재원이 투입되어 거목들을 베어내고 바닥을 돋워 주변의 정글 숲을 압도했을 테지만, 이제는 과거의 영화는커녕 사람 살던 흔적조차 세월의 더께 속에 묻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정글이 돼 가고 있는 ‘가엾은’ 곳입니다.

바로 앙코르 문명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곳은 앙코르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시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타프롬 사원’입니다.

▲ 사원 입구에서 만난 돌무지. 흡사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다.
ⓒ2007 서부원
잔인한 폐허입니다. 기적이라 불릴 만큼 위대하고 완벽한 건축물을 이토록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것은 다름 아니라 탐욕스런 인간의 영원한 대립항, 곧 자연입니다. 어디로부턴가 날아온 홀씨 하나가 거대한 돌 틈에 뿌리내려 육중하고 튼실한 벽채를 통째로 덮어 뭉개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을 하잘 것 없다며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자연의 섭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기실 오랜 시간을 거쳐 이룩해낸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도 시공을 넘어서는 자연의 거대한 울타리에서 보면 한낱 한때의 소꿉장난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일수록 ‘늘 그러한’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더 많이’ 파헤치고, 깨뜨리고, 뜯어 낸 '생채기'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은 그러한 인간에게 때때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재해를 안기기도 하지만, 웬만한 것쯤은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듯 너그럽습니다. 악취 나는 오폐수를 강물에 흘려도 바다에 닿을 때쯤에는 맑혀 있는 것도, 길을 내기 위해 두부 자르듯 산허리를 잘라 낸 흉측한 비탈면이 긴 세월 지나 울창한 숲으로 변하는 것도 결국 자연의 헌신적인 너그러움에 기인합니다.

▲ 나무의 뿌리에 제압당하는 벽채의 일부. 마치 기중기로 무언가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2007 서부원
▲ 나무의 뿌리는 벽을 타고 내려와 어느새 땅 속으로 파고들어 가고 있다.
ⓒ2007 서부원
입구에서부터 석재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널브러져 있습니다. 언뜻 보면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지만 여전히 화려한 조각이 살아있어 옛 영화를 넌지시 떠올려 볼 수는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길 주변으로는 온통 나무의 줄기처럼 곧은 뿌리가 성벽 같은 돌 더미를 집어 삼키는 장면뿐입니다.

나무로 깎아놓은 듯이 정교한 이 사원 건축물의 재료는 모래흙 성분의 사암입니다. 그래서인지 나무가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꺼이 받아주었습니다.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숙주로서 기능하며 나무를 먹여 살렸으나, 종국에는 나무의 배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 폐허가 되는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등나무처럼 비비 꼬며 벽면을 타고 내리는 것도 있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떤 물건을 감싸 쥐듯 덮은 것도 있으며, 담장을 따라 나란히 내달리며 건물과 한 몸이 된 것도 있습니다. 곁뿌리 하나가 족히 한 아름이 넘는 굵은 나무는 벽면을 타고 내려와 바닥까지 파고 들어간 채 버티고 섰으며, 어떤 것은 나무줄기의 흰빛이 도드라져 괴기스럽기까지 합니다.

▲ 흰 뿌리가 여러 갈래로 찢겨져 내려와 건물을 뒤덮는 모습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2007 서부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낯선 풍광 탓에 이 폐허 유적은 2001년 여름에 개봉된 영화 <툼 레이더>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무덤 약탈자’라는 뜻의 이 영화 속에서 이곳은 비록 단역에 불과하지만 ‘잃어버린 문명’을 대표하는 가장 강렬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불과 500여 년 만에 기세등등했던 인공의 힘이 자연의 섭리 앞에 여지없이 꺾였습니다. 지금도 건물의 벽 곳곳에 아이들 손바닥만 한 풀들이 약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래지 않아 이곳도 나무에 짓눌린 채 허물어져 갈 것입니다.

건축물을 만든 인간의 경험과 시각에서 보자면 잔인하리만큼 무서운 폐허의 과정이지만, 너그러운 자연의 품에서 보자면 다시 정화되어 자연으로 회귀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입구에는 유네스코의 지원과 인도 자본의 도움을 받아 복원을 시도했지만, 끝내 ‘복원’은 그만두고 ‘유지’, ‘관리’만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지금도 '자라고 있는' 나무가 '성장이 멈춘' 건축물을 압도하고 있다. 조만간 완전히 허물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2007 서부원
사원 전체의 절반 이상이 정글 숲에 잠겨(?) 있어 복원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다시 자연으로 환원되는 과정 역시 값진 문화유산일 수 있다는 관점이 제기된 까닭입니다.

식견을 갖춘 여행자일수록 화려하고 유명한 곳보다는 스러진 채 버려진 세월의 더께 그득한 폐허를 더 즐겨 찾는다고 합니다. 동 터오는 앙코르 와트에서 앙코르의 역사와 힌두교의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을 느꼈다면, 바욘 사원으로 대표되는 앙코르 톰 곳곳에서 화려하고 빼어난 문화적 절정을 체험했다면, 타프롬 사원의 폐허는 수많은 앙코르 유적군을 거치면서 갖게 된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는 곳입니다.

곧 앙코르 유적 여행을 정리하듯 마무리하기에는 제격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넘쳐나 번잡하고 소란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오후에 짬을 내 찾는다면 나무뿌리들의 얽히고설킨 모습조차 푸근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폐허의 돌무지 위에 걸터앉아 바쁠 것 없이 둘러보며 느끼는 공간감은, 화려하고 거대한 유물을 마주할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느긋하면서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 타프롬 사원의 또 하나의 상징인 '통곡의 방' 내부 모습. 효성이 극진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이곳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울었다고 하는데, 남 몰래 속으로 울어야 하는 권력자의 고뇌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2007 서부원
타프롬 사원에 매료된 한 관광객은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캄보디아를 찾게 된다면, 그것은 앙코르 와트나 앙코르 톰이 아닌, 바로 이곳 타프롬 사원을 다시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끝으로 여섯 편의 짤막한 [앙코르 와트 여행기]를 마칩니다. 시간을 내 다시 한 번 앙코르 유적군을 찾을 요량입니다만, 유적의 무게(?)가 워낙 넓고 깊은 탓에 그때 보고 느끼게 될 것들은 지금 얻어온 것들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될 것입니다. 생각만해도 설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