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행복한 날엔 은섬포에 가지 않는다

피나얀 2007. 3. 15. 19:40

 

출처-[오마이뉴스 2007-03-15 08:28]

 

 

▲ 은섬포에서 바라본 남한강. 한양으로 가는 물길이다.

 

ⓒ2007 강기희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설렘이 먼저 든다. 그것이 배부른 사람들의 삶이 아닌 민초들이 겪었을 역사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어렵게 사는 민초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그 시절의 삶이 더 힘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과거로의 여행은 강원도 정선에서 출발해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는 은섬포까지다. 여행길을 떠난 건 지난 3일. 소금배나 뗏목이 오고가던 시절 같으면 그것들을 얻어타고 한강 물길을 따라 유유자적 은섬포까지 갈 수 있을 테지만 댐이 생긴 이후부터는 마음만으로 족해야 한다. 은섬포에 가면 민초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흥원창(興元倉)이 있다.

흥원창에서 거두어들인 것은 쌀이 아니라 백성의 피와 땀

흥원창은 고려 13개 조창 중의 하나로 부론면 흥호리 은섬포(銀蟾浦)에 있었다. 은섬포는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횡성군 청일면 봉복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이다. 강이 만나는 은섬포는 그 품이 넉넉하여 세곡을 운송하는 평저선(平底船)을 대기에 좋았다. 평저선은 곡식 2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배로 흥원창에 21척이나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고려시대만 해도 은섬포를 떠난 평저선은 한강을 따라 여주와 한양을 지난 후 서해로 빠져나갔다. 그 배는 서해를 따라 예성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물길이 육로를 대신하던 시절 한강은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다. 남한강변에 법천사와 거돈사 등 대찰이 많이 있었던 것도 그러한 연유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엔 한강을 서로 접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남한강변에 유독 많은 산성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시절 정선지역의 세미(稅米)도 흥원창으로 갔다.

흥원창은 원주를 비롯해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지의 세미(稅米)를 모아 개성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했다. 세미(稅米)를 거두어들이는 시기는 가을 추수가 끝난 후이고 모아진 쌀은 다음 해 봄 평저선에 실어 개성으로 운반했다.

정선에서 흥원창까지의 쌀 운반은 남한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만 해도 뱃길보다는 육로로 운반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고작 뗏목이나 띄우는 시절이었으니 쌀을 운반할 배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흥원창은 이성계가 조선을 열고도 그대로 존재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성계는 흥원창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성계는 한강의 중요성을 알았던지라 이러한 것을 더 늘리기도 했다. 아무려나 흥원창이 들어선 부론면 흥호리는 가을이되면 쌀을 실어 나르는 우마차가 줄을 섰다고 한다.

사람이 꼬이면 당연히 주막거리도 생겨나는 법. 흥원창 주변은 큰 주막거리가 생겨났고 뱃일을 하거나 세곡을 운반하는 이들은 주막거리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헤어졌다. 고려 때만 해도 흥원창에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는 없었다고 한다. 창고가 정식으로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였다고 하니 곡물을 보관하는 일도 여간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세곡을 걷어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흥원창. 원래 마을에 있었지만 강변에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2007 강기희

 
▲ 1796년 정수영이 그린 흥원창 전경.
ⓒ2007 강기희
먹을 것도 없는 시절 사람들은 흥원창에 모아둔 세곡에 눈을 돌렸다.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있어도 당장의 끼니는 때워야 하는 것이 당시의 민초들 삶이었다. 그들은 밤이면 세곡을 훔치기 위해 갖은 작전을 다 세웠다. 그 일이 어쩌다 성공하기도 했지만 걸린 적도 많았다. 흥원창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후에야 그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고 한다.

은섬포에 가면 그곳을 스쳐간 이들을 만날 수 있다

흥원창이 있는 은섬포는 많은 사람이 들고 나는 곳이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만나는 은섬포는 강원 내륙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이성계에 의해 부론면으로 유배를 온 고려의 왕인 공양왕도 평저선을 타고 은섬포에 도착했다. 공양왕은 부론에 머물다가 삼척의 궁촌리로 떠나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은섬포를 거쳐간 이 중에는 이달과 허균, 허난설헌도 있다. 은섬포에서 산 하나 넘으면 이달의 집이 있다. 그들 일행은 산을 넘으며 흥원창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면을 토론했을 것이다. 법천사에서 입적한 지광국사도 은섬포를 이용했고 양주 조안에 살고 있던 다산 정약용도 은섬포를 이용해 부론에 있는 조상의 묘를 찾아갔다.

흥원포(興元浦)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은
가로지른 서까래 일자(一字)로 연했어라
봄철 조운을 이미 다 마쳤는데도
또 호탄전(護灘錢)을 강요하여 받아내누나

- 다산 정약용 '강행절구(江行絶句)' 전문


다산의 눈에 비친 흥원창의 모습이 이렇다. 옛 창고 건물이 일자(ㅡ子)로 변했으며 봄철 이미 세곡을 다 바쳤는데도 또 포구 사용료를 강제 징수한다는 것이다. 다산의 시구만 봐도 당시 민초들의 피폐한 삶이 짐작된다.

봄철 세곡을 운반하던 시기가 되면 뱃삯도 크게 올라 배를 타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민초들의 삶이란 것이 언제나 핍박받는 대상이었음에 흥원창 또한 민초들의 고혈을 짜는 장소와 다름없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흥원창은 사라지고 없지만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 여강이 되는 강변에 서면 수백년 세월 동안 은섬포를 거쳐간 이들의 자취가 그려진다. 공양왕의 눈물이 그러하고 혀균과 난설헌의 맑고 당찬 눈빛이 그러하다.

술에 취한 이달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일 듯도 한 은섬포는 낯선 제방이 들어섰다는 것을 빼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다만 변하고 사라진 것은 사람이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 은섬포 나루이다.

▲ 멀리 보이는 산 아래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2007 강기희

 
▲ 흥원창의 유래가 적힌 표지석.
ⓒ2007 강기희
이달은 비록 비루한 삶을 살았지만 벗들이 많았다. 그의 인물됨과 시를 아끼는 벗들은 그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먼 산에는 아름다운 기운 감도는데
긴 물구비에 햇빛이 걷히는구나
친한 벗이 눈 속에 오직 하나 보이는데
향기로운 풀은 주변에 충만하구나
글 모임에 이달의 시를 당할 자가 없고
맑은 이야기속에는 술미 멀지 않도다
어찌 벼슬을 근심하겠는가
종일 흥원창 풍파와 함께 있으니

- 조선 중기 문신 노수신의 시 '흥원 배 가운데서 이달에게 주다' 전문


아마도 노수신과 이달이 은섬포에 배를 띄워놓고 술잔을 기울였던 모양이다. 노수신이 즉석에서 시를 써서 이달에게 건네는 장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글을 천천히 읽다보니 은근히 술 냄새도 풍기는 듯하다. 노수신은 후에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이니 이달의 벗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예가 된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행복한 날엔 은섬포에 가지 마라

은섬포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은 여주 땅이다. 강천면과 점동면이 고루 보이는 은섬포에서 할 일은 강을 따라 나있는 길을 걸어보는 일이다. 흙길을 따라 걷다보면 그 길을 스쳐간 이들을 다 만날 수 있다. 마음을 조금만 열면 그들이 나눈 대화와 그들의 가슴에서 폭발한 분노까지 다 들을 수 있다.

길을 따라 걷다 섬강에 발을 담궈보는 일도 권할 만하다. 호수처럼 넓은 남한강에 비해 섬강은 개울처럼 만만하다. 횡성의 봉복산에서 물길을 만든 섬강의 길이는 남한강까지 250리 밖에 되지 않는다. 산에서 흘러내린 찬 물이 식기도 전에 큰 강을 만나는 곳이니 섬강의 물은 맑고도 시원하다.

옛날 같으면 들병이들이 갈대숲에 술잔을 펴놓고 색주가를 부르기도 했겠지만 요즘의 은섬포는 조용하기만 하다. 여행자가 은섬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청량한 바람과 너른 강물이 주는 여유다.

어스름 해질녘이 되면 은섬포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황홀하다. 하늘에 구름 몇 개가 떠있는 날은 구름에 물든 노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은섬포에 온 값을 한다. 강물에 번진 노을을 바라보며 살아온 삶을 하나씩 끄집어 보는 일도 할 만하다.

미리 준비한 쓴 소주 한 병 있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술병 비워내다 오래전 은섬포를 드나들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흥원창과 은섬포 여행은 마쳐야 한다. 은섬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함에 입이 귀에 걸리도록 행복한 날은 절대로 은섬포에 오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 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선으로 갈 수 있다.

 

ⓒ2007 강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