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패션】

미래를 옷으로 먼저 입는다

피나얀 2007. 4. 17. 21:19

 

출처-[주간조선 2007-04-17 14:50]

 


세계 패션계, 광택 옷감·금속 재질로 사이보그 느낌을 내는 퓨처리즘 바람
 
 
요즘 ‘사이보그’라는 단어가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그 입지가 남달라진 것 역시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패션이 영화만큼만 대중적으로 사랑 받고 인정 받는 분야였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독일 영화감독인 빔 벤더스를 알고 프랑스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오종의 매니아를 자처하는 만큼만 칼 라거펠트나 니컬러스 게스키에르에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이들은 현재 하이패션계 최고의 브랜드인 샤넬과 발렌시아가를 이끌고 있는 수석 디자이너다) 사정은 틀림없이 달라졌을 것이다. 장담컨대 2007년 현재 ‘사이보그’라는 단어는 영화보다 패션에서 더 무게가 실리는 말이니까.
 
1년에 두 번,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세 도시 뉴욕 · 밀라노 · 파리에서는 패션계 최고의 이벤트인 패션위크가 열린다. 이 시기가 되면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다가올 시즌의 트렌드를 점치며 각 도시로 몰려들고, 자신만의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해 다가오는 시즌에 유행할 의상을 패션쇼로 선보인다.

패션위크 기간이 되면 디자이너뿐 아니라 ‘프라다를 입는 악마’를 비롯해 세계의 패션을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음 시즌의 트렌드를 움직이고 결정한다. 계절이든 시대든 일단 앞서가고 보는 게 패션의 본질이지만 이 행사는 늘 한 템포 빠르게 진행돼 지금 우리 앞에 놓인 2007년 봄 · 여름 시즌은 2007 S/S 시즌 패션위크가 열린 지난 가을에 이미 그 향방이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우리가 겨울 옷을 고르고 있었을 그 가을, 거장들이 결정한 올 봄 · 여름 트렌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트레이닝 복이나 스니커즈 같은 스포츠룩의 디테일을 가미한 스포티즘, 심플한 선과 색의 미학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즘,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것이 바로 ‘사이보그 패션’ 퓨처리즘이다.
 

 
 
사실 1900년대 초반에 발생해 퍼져 나갔던 예술사적 의미의 미래주의(Futurism)와는 달리, 복식사적 의미에서 본 퓨처리즘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1961년 4월 12일 러시아가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쏘아 올린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미지의 공간인 우주와 우주인, 그리고 바야흐로 직면해 온 인류의 미래에 집중됐다. 사회상을 첨예하게 반영하게 마련인 패션이 이와 같은 경향을 지나칠 리 없었고, 당대의 디자이너들은 인공적 소재와 사이키델릭한 컬러, 모던하고 단순화된 실루엣으로 앞다투어 저마다의 룩을 선보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디자이너로는 앙드레 쿠레주, 피에르 가르뎅, 파코 라반 등이 있다. 이 중 쿠레주는 1964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미니멀한 실루엣의 의상과 납작한 굽의 신발, 얼굴을 뒤덮는 커다란 흰색 선글라스에(안경테뿐 아니라 안경 전체가 흰색이었다) 가운데만 가느다란 틈을 넣은 ‘개기일식 안경’, 짧은 흰색 장갑으로 이루어진 ‘문 걸(moon girl)’ 컬렉션을 선보였고, 이로 인해 당시에도 지금만큼이나 까칠하기 이를 데 없었던 패션계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피에르 가르뎅 역시 1966년 직선적인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피나포어’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드레스와 둥근 펠트 헬멧으로 컬러풀한 미래주의 룩을 선보였다. 이들 디자이너의 다양한 컬렉션이 모여 패션계에서 흔히들 말하는 ‘60년대풍 퓨처리즘’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2007년의 봄과 여름을 수놓을 미래주의는 현세대의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꿈꾸는 ‘2500년쯤의 미래’에 대한 해석이 담긴 것일까? 재미있는 건 여기서부터다. 패션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패션은 돌고 돈다’는 설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겠지만, 사실 퓨처리즘이야말로 이 가설이 딜레마에 빠지고야 마는 부분이다. 마땅히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퓨처리즘이지만, 21세기의 퓨처리즘은 500년 후의 미래지향이 아닌 과거 1960년대를 향한 향수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옛날에는 21세기(바로 지금!)를 먼 미래로 그리며 디자인을 했고, 그 미래가 현재가 된 지금에는 가장 미래적인 룩을 만들기 위해 과거에 만들었던 미래적인 룩을 참고하는 셈이니, 이것을 도대체 레트로(retro · 회귀)라 해야 할지 퓨처리즘이라 해야 할지….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패션은 복식사의 어느 시점엔가를 향한 끊임없는 오마주로 이루어져 왔고, 그렇게 따져보면 스타일이란 무엇보다 단순한 자기 복제가 아닌 끊임 없는 재창조라는 데에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2007년의 미래주의 패션은 1960년대의 그것과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우선 눈에 가장 쉽게 띄는 것은 번쩍이는 광택의 금속성 소재다. 이 광택 소재의 유행은 이미 지난 시즌부터 시작되어 이번 시즌에는 제대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사실 광택 소재가 퓨처리즘 패션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가장 압도적인 유행이라는 사실만큼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이견이 없다. 펜디, 구찌, 버버리를 비롯해 트렌드를 주도하는 숱한 디자이너들이 컬렉션을 통해 옷과 가방, 신발 등에 아낌없이 사용된 광택 소재를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실제로 지난 가을 밀라노에서 방문했던 펜디의 쇼룸은 신소재 전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 신기한 질감과 광택의 소재로 가득했다. 구찌와 버버리의 쇼룸도 눈부신 실버 컬러로 채워져 있기는 마찬가지. 이처럼 패션위크 기간에 발표된 따끈따끈한 아이템의 유행 성패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바로 다음 번 패션위크 때인데, 유수의 패션 피플이 바로 한 시즌 앞의 옷과 가방, 발로 무장하고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지는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난 2월에 열렸던 2007 F/W 패션위크 기간, 뉴욕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의 팔에 걸려 있는 거울처럼 번쩍이는 가방과 은광이라도 헤매다 나온 듯한 하이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정은 국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편. 지금이라도 청담동이나 명동처럼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 몰리는 곳에 작정하고 주저앉아 관찰해보면 길을 걷는 여성의 옷차림에서 ‘빛’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방용 은박 호일처럼 매끈하게 처리한 가죽 가방의 광택에서부터 코팅한 후 벗겨 내 구깃구깃해진 부드러운 가죽 재킷 광택, 합성섬유로 얇게 짜 사각거리는 점퍼의 인공적인 광택, 검정 실에 은사를 섞어서 짰을 뿐인 반짝이 스타킹의 광택까지, 그 농도와 느낌은 외국의 도시에 비해 조금 얌전하고 상당히 소심해졌을지언정 광택 소재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이 메탈릭한 소재는 일찍이 회자되어 오던 퓨처리즘과는 또 다른 형태를 구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미래적인 의상을 설명할 때 모델로 곧잘 불려오던 ‘제5원소’의 빨간 머리 리루나 ‘스타워즈’의 로봇들, ‘매트릭스’의 등장인물은 올해는 잠깐 쉬어도 좋다. 굳이 모델을 원한다면 창백한 흰색의 보디 수트를 입고 기지를 탈출하던 마이클 베이의 영화 ‘아일랜드’의 두 주인공이 도망치다 말고 불려오거나, ‘공각기동대’의 공안9과 요원들이 싸우다 말고 소집되어 와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난 가을 발렌시아가는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커다란 플라스틱 선글라스와 번쩍이는 금속 조각이 촘촘히 연결된 금색 레깅스 룩으로 새로운 퓨처리즘의 나아갈 바를 한번에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메탈릭한 질감의 레깅스, 일명 쫄쫄이 바지는 조각조각을 일일이 수공으로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개당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천문학적 가격대로도 숱하게 회자되었다. 어렵다고? 굳이 패션 관련 사이트에 드나들거나 패션지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검색창에 ‘퓨처리즘 트렌드’ 두 단어를 치기만 하면 몇 천만원 하는 발렌시아가의 레깅스가 어떻게 생긴 건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처럼 퓨처리즘 트렌드에 관한 많은 내용은 어지간한 보도망보다 촘촘하게 연결된 일반인의 패션 블로그를 순식간에 점령하면서 재구성되고 있다. 기존 세대 간에는 ‘사모님들의 돈잔치용’으로 인식되던 하이패션이 젊은층에는 ‘앞선 유행’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유행은 순식간에 하위 패션으로 퍼져 나가는 법.(특히 우리나라에선 더 그렇다.) 이미 발렌시아가의 금속 레깅스를 흉내 내어 금도끼 은도끼 같이 번쩍이는 레깅스들이 동대문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정도라면 오늘 ‘발렌시아가’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당신이라도 ‘당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방관하고 있을 일만은 아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멀게만 느꼈던 퓨처리즘의 트렌드는 지금 바로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