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합르페르 2007-05-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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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년 전 탁월한 항해술과 전투력으로 유럽 대륙 정복을 도모했던 바이킹 선단은 오슬로(Oslo)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바이킹의 후예들은 이제 뿔 달린 투구를 벗어버리고 가족과 함께 연어요리를 만들며 요트와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긴다. 그들은 멀리 지중해까지 원정을 떠나 이민족의 땅을 정복하던 응축된 에너지를 가족의 행복, 평등과 인류애의 구현에 쏟아붓고 있다.
◆가족의 온기로 세운 조각공원
지금이야 세계 3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100여 년 전 노르웨이는 유럽 변방의 약소국에 불과했다. 북해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되기 이전으로 궁핍하고 고단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건 속에서도 노르웨이인들은 의식의 고양과 실천에 앞장섰다. 오슬로를 찾은 여행객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sparken)이 그 좋은 예다.
비겔란 조각공원은 오슬로 시내 북동쪽 드넓은 평원에 조성돼 있다. 공원 내 푸른 잔디밭은 주말이면 집에서 구운 호밀빵과 간단한 해산물 요리를 만들어 피크닉을 나온 가족들로 가득하다. 평일에도 일찍 업무를 마치고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로 공원은 늘 붐빈다. 수영장과 테니스코트, 아이스링크도 갖추었으며 휴일엔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여유를 즐기는,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 속에 인간 존엄의 가치가 깃든 노르웨이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본래 농장이었던 이곳을 오슬로 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킨 이가 구스타프 비겔란(Gustav Vigeland)이다. 20세기 초 오슬로시가 그에게 공원의 전체적인 설계와 조각작품을 의뢰했고, 비겔란은 이후 10여 년 동안 청동, 화강암, 주철을 사용해 사람이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희로애락을 200여 점의 작품에 담아냈다.
비겔란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기쁨과 슬픔, 격정과 허무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영민함과 사실적 표현기법에 놀라게 된다. 차가운 돌과 쇠붙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는 듯하고, 남자의 팔뚝은 핏줄이 꿈틀대는 듯하다. 실제 모델이 단 위에 올라가 퍼포먼스를 하는 것처럼 체온이 전해진다.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 조각상을 지나면 멍한 눈으로 쭈그리고 앉아 발가락만 꼬물대는 노인 조각상이 등장해 인간의 삶과 본성을 자각하게 한다.
조각공원에서 비겔란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가족이다. 공원의 모든 작품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도 무방할 정도다.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노는 아버지, 따스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품 안에 껴안는 어머니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의 약동하는 생명력과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 공원 전체에 구현돼 있다. 진실하고 선한 이들의 사랑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비겔란은 그 자신이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난 속에서 자란 탓에 가족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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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비겔란이 조각공원을 기획하고 작품을 구상하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과 겹쳐진다. 인간 존엄성이 파괴되고 인류애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참혹함 속에서 그가 발견한 구원의 빛은 가족이었다. 그는 혹한의 겨울, 거실 벽난로 앞에서 부모의 무릎을 베고 잠든 아이들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비겔란의 가족지상주의는 지금도 오슬로에서 유효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도 이혼과 동거가 일상화돼 가족해체론이 대두될 만하지만 양상은 달랐다. 노르웨이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제도가 거의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여성에게 1년간 유급 육아휴직이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도 육아휴직을 사용토록 하는 '파파 쿼터제'를 도입했다.
미혼모나 결손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제도화했다. 또, 세대간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다양한 레저,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옛 대가족이 분화했을 뿐 가족은 여전히 생활의 중심이었다.
가족지상주의와 함께 오슬로에서 감지되는 또 하나의 가치는 평등 이념이다. 평등은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ㆍ독립하면서 표방한 사회복지국가의 근간을 이룬다. 교육, 고용, 복지 부문에서 누구나 공정성에 기반한 평등원칙을 따른다.
언뜻 보면, 전제시대 상징인 국왕이 버젓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평등을 논한다는 게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슬로 궁전의 왕은 일반 시민과 별반 차이가 없다. 독립 당시부터 입헌군주로 추대되었지만 영국 왕실처럼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지도, 일본이나 태국 왕처럼 살아있는 신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오슬로 시내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왕실 가족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또 겨울이면 오슬로 교외 산기슭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하랄 5세 국왕의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스키를 타는 국왕 곁에는 경호원 한 명이 수행원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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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시내 중앙에 자리한 왕궁은 담장도 경찰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정문에 위병 초소가 있긴 하지만 왕궁을 지키기보다 오슬로의 관광명물로 자리매김한 위병 교대식을 위한 시설로 다가왔다. 또, 철따라 꽃이 만발한 왕궁 정원은 오슬로 시민이면 누구나 들어가서 거닐 수 있다. 물론, 관광객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왕도 시민의 일원인 오슬로에서 특권의식은 발붙일 곳이 없다. 제아무리 유명인사이고, 정부부처나 기업체 고위직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줄을 서고 기다려야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오슬로 시청사 인근 부두에 정박해 있는 왕실 전용 요트도 마찬가지였다. 노르게(Norge-노르웨이라는 뜻)라고 새겨진 왕실 전용 요트도 다른 수십 척의 요트, 범선과 나란히 묶여 있었다. 백야의 피오르드 선상 파티는 왕후장상이 따로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여름밤 풍경이었다.
◆뭉크와 입센을 찾아서
오슬로 중앙역 광장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칼 요한(Karl Johans) 거리가 멀리 왕궁까지 뻗어나간다. 오슬로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리 양편으로 백화점과 상점, 카페와 레스토랑, 디자인숍이 길게 들어서 번화가를 이룬다. 넓은 인도와 공원도 조성돼 있는데, 해가 저물지 않는 여름 주말이면 노천카페가 등장하고 거리예술가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칼 요한 거리는 수세기 전부터 오슬로의 중심이었다. 계절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길목으로 주말이면 오슬로의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모두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오슬로항 부두 인근이 신흥 번화가인 아케르 브뤼게(Aker Brygge)와 함께 오슬로의 유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칼 요한 거리는 또한 노르웨이의 문화중심지이기도 하다. '절규'로 잘 알려진 뭉크의 작품이 소장된 국립미술관, 헨릭 입센의 희곡이 레퍼토리로 무대에 오르는 국립극장 등이 위치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슬로의 예술가들은 거의 매일 칼 요한 거리의 호텔 라운지나 카페에서 커피를 음미하고 산책하며 일광욕을 즐긴다고 한다. 바이킹 후예들의 멋과 여유, 예술적 감성을 경험하고 싶다면 한번쯤 찾아갈 만하다. 혹, 누가 아는가! 운이 좋으면 뭉크나 입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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