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고흐의 붓자국이 남아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피나얀 2007. 6. 14. 19:22

 

출처-레이디경향 2007-06-14 11:36

 

불꽃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한 고흐. 네덜란드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오베르에서 눈을 감았다. 우아즈 강가에 있는 마을 오베르에는 생을 통틀어 단 1점을 팔고 세상을 떠난 가난한 천재 화가 고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울에서 오르세 미술관전(4.21~9.2)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바로 오베르 쉬르 우아즈였다. 이번에 들어오는 작품 중 최고 걸작은 밀레의 ‘만종’이다. 당연히 밀레가 머물며 농부들의 삶을 그렸던 바르비종이 떠올라야 하지만 희한하게도 오베르 쉬르 우아즈가 더 다가왔다. 전시작 중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서 그린 ‘아를의 고흐의 방’ 역시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하숙집 방을 연상시켰다.
 
오베르를 특별하게 마든 고흐의 편지
 
프랑스 어느 곳이나 예술가의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오베르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고흐 때문인 것 같다. 오베르는 화가 고흐가 37년의 짧은 생을 접은 곳이다. 고흐가 오베르에 머문 날은 67일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고흐는 오직 그림만 생각했다.
오베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고흐의 일생을 알아보자. 오늘날 고흐의 자취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삶을 테오에게 편지를 통해 알렸다.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6백68통이나 된다. 고흐는 신교도인 칼뱅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품 상점의 점원으로 일했던 고흐는 한때 성서에 심취, 목사가 되려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벨기에의 보리나 주로 건너가 전도사 생활도 했다. 하지만 광적인 신앙심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전도사 생활도 힘들었다. 이후 그는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그림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림만 그렸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그림에 열중했는지 알 수 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쉬지 않고 계속 작업해왔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먹거나 마시는 시간까지 아낄 정도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1880년 8월 20일)
 
고흐는 성격은 괴팍했지만 마음은 여리고 약했던 것 같다. 고흐는 자신의 사촌 케이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이때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고흐는 이후 매독에 걸린 임신부를 데려와 살기도 했다.
 
‘지난 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다.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하루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1882년 5월)
 
이 여인의 이름은 시엔. 시엔은 고흐의 모델이 됐다. 하지만 그녀와도 헤어져야 했다. 가난 때문이다.
가난한 거장이 만들어낸 이름난 거리
 
고흐는 지금은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늘 최고가를 경신하는 작가지만 당시엔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느 화가보다 불행했다. 그가 남긴 작품은 8백79점. 이 중 생전에 그가 판 유화작품은 단 1점, 4백 프랑이었다. 아마도 많은 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흐 자신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른 그림이나 네덜란드 물가를 생각하면 얼마 안 되는 돈’이라고 썼을 정도다. 그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불쑥 1886년 3월 파리로 찾아왔다.
 
파리에선 동생 테오가 화상을 하고 있었다. 고흐는 6월부터 몽마르트에 있는 테오의 집에 머무르며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고흐가 머물던 집에는 그가 머물렀다는 안내판이 박혀 있다. 집은 제법 컸는데 아파트처럼 보였다. 사실 현재 이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집에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고흐는 몽마르트 언덕에서 당대의 화가들과 교류했다.
 
그가 만났던 화가는 로트렉, 베르나르, 모네 등 모두 이름난 거장이다. 고흐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카페는 르 콩쉴라다. 콩쉴라는 작은 카페다. 바로 앞에 그림엽서를 파는 가게와 식당이 늘어서 있고, 손풍금을 울리는 악사도 보인다. 고흐는 이 일대에서 압생트라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셨다. 술 때문에 몸까지 상할 정도였다.
 
어쨌든 고흐가 인상주의에 눈을 뜬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당시 화려한 색감으로 인상파 화가들을 현혹시켰던 일본의 우키요에 등을 보고 그의 화풍도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떠난다. 색을 찾아서. 고흐는 아를에서 고갱과 심하게 다퉜다. 고갱의 고백에 따르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쫓아와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섰다.
 
전해지는 얘기론 아를에서 자화상을 그렸다가 고갱으로부터 별로 닮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에 귀를 댕강 잘라버렸다고 한다. 고흐는 자신이 알고 지내던 창녀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에게 신문지에 싼 자신의 귀를 건네줬다. 창녀는 경찰에 신고했고, 이 사건으로 고흐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졌다. 고흐는 다시 파리로 왔다가 동생과 심하게 다툰 뒤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내려갔다. 1890년 5월 21일이다.
 
오베르에 남아 있는 고흐의 흔적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우아즈 강가에 있는 오베르 마을이란 뜻이다. 마을 곳곳에서는 고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흐 그림의 배경이 됐던 들녘과 성당 앞에는 그의 작품사진을 곁들인 안내문이 서 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베르 노트르담 성당. 화가 도비니 동상 뒤로 서 있는 오베르 성당은 천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고흐의 그림처럼 지붕선도 삐뚤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시골 성당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순례객들이 몰려든다.
 
화구를 들고 온 백발의 신사, 일본인 단체관광객, 한국인 배낭여행자….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들어올 수 있는 외진 마을까지 찾아온 여행자들은 대부분 고흐에 흠뻑 빠진 사람들이다. 고흐가 오베르까지 왔을 때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이다. 고흐가 오베르에 온 것은 닥터 가셰로부터 치료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그는 가셰 박사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그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고흐가 그린 ‘닥터 가셰의 초상’은 1990년 8천2백50만 달러에 낙찰,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작품으로 기록됐다. 2004년에 피카소의 작품이 1억 달러가 약간 넘는 가격으로 최고 경매가를 경신했지만 1990년 물가와 2004년 물가를 비교해서 계산하면 아마도 고흐 작품이 더 값비싼 작품일지도 모른다. 미술품 경매 사상 세계 최고가 10위 내에 고흐의 작품이 2개나 들어 있다. 오베르 마을 시청사 앞 고흐가 묵었던 라부 하숙집이 있다. 현재는 그의 기념관으로 쓰인다.
 
당시 월세 3프랑을 주고 묵었던 하숙집 3층 다락방은 작고 조그맣다. 이 다락방이 예술의 전당에 전시 중인 ‘아를의 고흐의 방’과 닮았다. 화구를 놓고 몸 누일 자리밖에 없던 이 집에서 하숙집 딸 아들렌느의 초상화도 그렸다. 인상파 시조 도비니 등 선배 화가들이 묵었던 집이기도 하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광적으로 그림에 매달렸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9시까지 붓을 잡았다고 한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별이 반짝이는 밤’ 같은 작품도 이때 그렸다. 이 그림은 초현실적이다.
 
해와 달이 함께 있는 것도 특이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1890년 7월 28일 그린 ‘밀밭의 까마귀.’ 성당 뒤편 오솔길로 올라서면 바로 그 밀밭이 펼쳐진다. 밀은 아직 익지 않아 그림과 달리 푸릇푸릇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평화롭고 평범한 들녘. 하지만 고흐의 밀밭 그림을 보면 붓자국 하나하나가 꿈틀꿈틀하다. 한여름의 햇빛이 그림 속에 녹아 있고, 예술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붓자국 속에서 또렷하다.
 
오베르에서 숨을 거둔 위대한 화가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갑작스런 자살 충동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에서 그림을 그린 뒤 권총으로 가슴을 쐈죠. 피를 흘린 채 하숙집으로 내려왔다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고흐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7월 30일 고흐는 숨졌다. 오베르 마을에 동행한 가이드 이상민씨는 “고흐의 일생은 죽는 순간까지 극적이었다”고 말했다. 고흐의 몸속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가 발견됐다.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다. 그런 건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은 아니다.’
 
그의 편지는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7월 24일 이전에 썼으나 편지 내용이 우울해 부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형의 죽음 이후 테오도 6개월 후에 죽음을 맞았다. 파리에서 자신과의 말다툼 때문에 형이 오베르로 내려가 일을 저질렀다고 믿었던 것일까. 아마도 당시 다툼은 돈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 달 만에 형이 자살을 했으니 테오도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았고 6개월 만에 고흐를 따라 세상을 등졌다. 밀밭 옆 공동묘지엔 고흐와 동생 테오가 나란히 누워 있다. 그의 묘지에는 전 세계에서 고흐의 숭배자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댔다. 경매장에 그의 그림이 나올 때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천재예술가의 묘지라기엔 너무나 초라하다. 작은 묘비 하나뿐인 묘지. 관광객이 그의 작품을 생각하며 얹어놓은 해바라기가 애처롭다.
 
‘요즘은 온통 그림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화가들처럼 잘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다…’(1890년 7월 24일)
 
고흐는 그가 닮으려 했던 수많은 화가보다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행여 파리에 가거든 고흐의 흔적이 있는 몽마르트의 카페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다녀오시라. 거기선 꾹꾹 찍어 누르고, 꿈틀거리는 붓자국처럼 고흐의 강렬했던 생애를 볼 수 있다.
▶여행수첩
 
오베르는 파리 생라자르 역에서 퐁두아제까지 간 뒤 오베르행 교외선으로 갈아탄다. 혹은 북역에서 메리슈아르 역까지 간 뒤 오베르행을 바꿔타도 된다. 렌터카는 15번 고속도로∼115번 도로를 탄다. 파리에서 오베르까지는 35㎞. 서머타임을 실시하면 시차는 7시간. 최소 한나절 정도는 잡아야 한다. 하루 코스로 다녀오기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