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요리】

이만한 맛에 이 가격, 기적에 가깝다

피나얀 2007. 6. 30. 20:05

 

출처-오마이뉴스 | 기사입력 2007-06-30 16:56

 

 

▲ 파고다 공원 돌담 골목은 대표작인 소외계층인 노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독특한 그들만의 거리이다.

 

ⓒ2007 이덕은

 

워낙 냉면을 좋아하는 나에게 어느 날 집사람이 신문을 펼쳐 슬쩍 밀어놓는다. 온갖 미사여구로 양념을 해놓은 맛집 탐방기를 나름대로 판단하는 기준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낙원동 파고다공원이라는 단어들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지(垈地)도 변변히 없이 도로 위를 점령하고 있는 건물, 낙원상가. 그 이상한 건물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인사동, 다른 한쪽은 낙원동이 자리잡고 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모두 다 구질구질하게 보이겠지만, 한쪽이 간드러진 상술이 스며든 곳이라면, 다른 한쪽은 그나마 그런 혜택조차 보지 못하는 그늘진 곳이다.

▲ 낙원동은 70-80년대 열차집을 다녀 본 사람들이라면 향수를 일으킬 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2007 이덕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곁에 있지만 천덕꾸러기처럼 나홀로 도심 속의 고도처럼 남아 있는 곳이 낙원동이다. 그나마 허리우드 극장, 악기상가, 사진재료상, 떡집들이 낙원동의 이름을 지킬 뿐 노인들이 잘 찾는 곳이어서 더욱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느껴지는, 낙원동은 시들어 가는 낙원(樂園)일 뿐이다.

낙원상가와 이어지는 파고다 공원 뒷담길은 노인들 세상이다. 아니 사실은 그외 소외받는 다른 계층들도 이곳에 많이 있다고 하나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니 확인할 길이 없다. 그에 걸맞게 골목에는 수건이 잔뜩 걸린 건조대를 내어놓은 이발소, 셀 수도 없는 메뉴를 빼곡히 적은 입간판을 내어 놓은 간이식당들이 실비를 자랑하며 터잡고 있다.

▲ 식당밖에 간이로 만들어진 주방에서 온 식구가 출동하여 냉면과 녹두부침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2007 이덕은
이런 영업집들은 하나같이 칠팔십년대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어서 그 시대에 열차집 빈대떡을 먹어 본 사람들이라면 향수가 일어날 만한 조건을 거의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좀 전에 얘기한 대로 이곳이 주머니가 가벼운 소외계층이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니 잠시 즐기더라도 표시 안 나게, 음식값 올리는데 일조를 하고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IMF를 겪으며 저렴한 가격대 기사식당들을 가끔 보지만 이곳은 그 옛날부터 '실비'의 진수를 보여 주는 집들이 많다. 그러나 개중에는 실비임에도 불구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맛을 보여 주는 곳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낙원상가와 파고다 공원 돌담이 만나는 곳에 있는 '유진식당'이다.

이집 주방은 아예 비좁은 식당 앞에 간이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냉면을 뽑고 부침개를 만든다. 온 식구가 동원된 듯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그리고 종업원들 모두 정신없이 뽑고, 지지고, 주문받고, 날르고, (깍두기를) 담근다.

▲ 끓는 물에 빠진 국수를 나뭇가지로 엉겨 붓지 않게 젓고 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끓는 물에서 국수가 저절로 나오는 것 같다.
ⓒ2007 이덕은
바쁠 때 퍼질러 앉아 부침개와 수육을 시켜 술을 먹는 손님들에게 눈총을 주는 일도 없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철판에 다진 돼지기름을 두르며 녹두 부치는 것을 보거나, 끓는 물에 들어 간 국수를 나뭇가지로 휘휘 저으며 익히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이다.

그것을 보면 어렸을 때 누님이 코카콜라병에 젓가락을 넣고 휘휘 저어 식초를 만들어서, 빙초산을 희석시키는 줄 몰랐던 그때는 맹물로 식초를 만든다고 신기해 했던 생각이 난다. 몇 년을 썼을 것 같은 껍질도 벗기지 않은 나뭇가지로 끓는 물을 휘휘 저어 국수를 말아 건저 올리는 것을 보면, 아마 저 나뭇가지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 돼지기름으로 부쳐낸 녹두부침. 노랗게 눌은 부침이 아삭하게 씹힐 때면 막걸리 한잔이 절로 생각난다.
ⓒ2007 이덕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식당 격에 맞지 않는 문화 물먹은 아줌마(?)들도 간간히 앉아서 비좁은 공간이나 불편한 똥글뱅이 의자, 합석의 불편함, 냉면 사리 뽑을 때마다 차단기가 떨어져 암흑이 되는 것도 감수하고 얌전히 기다린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식당도 새롭게 변모하여 체인점을 내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그러나 이 좁은 공간에서 평양냉면과 녹두부침을 매개로 만들어지는 야릇한 평등함에 경이로움까지도 느껴진다.

냉면이 올 동안 부침개를 먼저 시킨다. 따로 고기를 집어 넣지 않은 녹두부침은 젓가락으로 잘라도 잘 잘라지니 녹두 이외 전분은 별로 들어 간 것 같지는 않다. 따끈한 한 점 입에 넣으니 살짝 누른 부분이 아삭하게 씹히며 고소한 맛이 술 한 잔 당기게 만든다.

▲ 메밀껍질이 점점히 박힌 사리에 냉면김치, 오이, 편육, 입가심 달걀이 얹혀져 얼음 육수에 담겨져 나온다.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맛을 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2007 이덕은
이제는 강한 양념 맛에 길들여져 아이들은 비빔냉면을 좋아하지만 평양냉면 집에서도 비빔냉면만을 고집한다면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평양냉면은 국수와 냉면 김치를 한데 집어 국물과 함께 후르륵 마시며 씹어 먹어야 제격이다.

내 앞에 도착한 냉면 한 그릇. 우선 점점히 메밀 껍질이 박힌 사리와 그 위에 얹혀진 하얀 냉면김치와 오이 그리고 편육이 육수에 둥둥 떠 있어 식욕을 자극한다. 식초를 조금 넣고 사리를 풀어 냉면김치와 함께 먹는 사리맛은 풍성한 메밀맛이 듬뿍 느껴진다.

육수를 들이킨다. 이건 약간 감치는 맛이 덜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가격에도 이런 맛을 내기 힘든데 3500원이란 가격에 이만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낙원동 골목은 오래된 친구와 한잔 기울이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힘든 곳이다. 자 친구에게 전화 한번 걸어 볼까요? 낙원동으로 나올래?
ⓒ2007 이덕은
낙원동은 품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러니 분위기 있는 데서 식사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불알친구나 막말을 주고 받아도 섭섭해 하지 않을 친구와 옛날을 생각하며 가격 대비 맛에 놀라워 하며 끈적한 부대낌을 안주로 생각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