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강릉③ 두 여자 이야기,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피나얀 2007. 7. 5. 18:46

 

출처-연합르페르 | 기사입력 2007-07-05 10:22

 

 
강릉 오죽헌 마당에는 줄기 빛깔이 검은 오죽(烏竹)과 함께 배롱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수령 600년이 넘었으니 신사임당과 율곡이 살던 시대에도 꽃이 피었을 것이다. 탐스러운 분홍 빛깔의 꽃이 여름 내내 피는데, 그 기간이 100일이 넘어 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온전한 덕, 두루 통한 재주
 
신사임당(申師任堂ㆍ1504~1551)은 수백 년 전 인물이지만 아직도 그 체취가 짙다. 한국인이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 고액권 화폐의 유력한 도안 후보로 부상하고 있으니 오죽헌 배롱나무만큼 생명력이 강한 셈이다.
 
팔작지붕 정면 3칸의 오죽헌 방 안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꼿꼿한 표정의 사임당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임당은 1536년 외가의 별당 건물인 이곳에서 이율곡을 낳았다고 한다.
 
딸부잣집 둘째로 태어난 사임당은 어려서 이미 경전을 통했고 그림, 글씨, 문장, 바느질, 자수에 뛰어났다. '덕을 온전히 갖추었고, 재주 또한 두루 통하니 어찌 여자라 하여 군자라 부르지 못하겠는가? 사임당은 여자 중의 군자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훗날 영의정을 지낸 정호가 남긴 말이다.
사임당은 열아홉에 덕수 이씨 집안으로 출가하지만 남편의 동의를 얻어 계속 외가에서 지냈다. 서른여덟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대부분을 강릉에서 머물렀다. 그 사이 학문이 깊지 못했던 남편을 내조해 입신양명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율곡을 비롯한 7남매를 길러냈다. 사임당 사후 셋째 아들 율곡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경세가로 이름을 떨친다.
 
오죽헌 경내 율곡기념관에선 사임당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대표작인 초충도 병풍을 비롯해 시문과 초서 글씨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포도와 산수를 묘사한 그림은 안견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지에 이른 사임당의 혜안과 현숙함, 덕성과 재능이 신묘막측할 따름이다.
 
*오죽헌 시립박물관 033-640-4457, www.ojukheon.or.kr
 

◆시대와 불화한 천재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ㆍ1563~1589)은 여러 면에서 신사임당과 대비된다. 사임당이 한국 여인상의 사표로 알려진 반면 난설헌은 가부장적 봉건사회의 희생양으로 묘사된다. 시인으로서 천품(天稟)을 타고났지만 자유분방한 기질과 감성이 시대상황과 부딪쳐 제 뜻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졌다.
 
초당두부로 잘 알려진 강릉시 초당동에 지난 봄 허균ㆍ허난설헌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남매의 생가터 인근에 1층 목조 기와 건물로 지어진 기념관은 난설헌의 시세계와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 놓았다.
 
난설헌의 아명은 초희(楚姬)다. 시와 문장이 뛰어났던 허엽의 딸로 태어난다.이미 여덟 살에 사륙체의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 불리었다. 시는 오빠 허봉의 글벗인 이달(李達)에게서 본격적으로 배웠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통한 이달은 서얼 출신이어서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벼슬길 대신 유유자적한 생활을 택한 이달의 자유분방함과 사회비판적인 경향은 난설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난설헌은 15세에 안동 김씨 집안으로 출가한다. 하지만 유교사회의 행동규범에 순응하지 않았던 탓인지 고부갈등이 심했다. 불운이 잇따라 어린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는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당호처럼 난초의 고결함과 눈의 순백을 간직한 채 스물일곱에 생을 마감한다.
 
난설헌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랬다. 여성의 섬세한 필치와 감상으로 애상적이며 도가적인 시풍의 시세계를 창조했다. 그녀가 남긴 작품은 바다 건너 중국에서 먼저 평가받았다. 명나라 3대 문사로 꼽히는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으로부터 시선집 '난설헌집'을 얻어간 것이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난설헌의 시는 '깨끗하고 장하며 높고 고와서 진신사부가 모두 칭찬한다'는 평을 받았다. 시집은 18세기 초 일본에서도 간행돼 널리 애송된다. 마침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등극한다.
 
난설헌은 생전에 '조선이라는 소천지(小天地)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것, 시재(詩才)를 타고났지만 봉건사회의 굴레 속에서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것'을 한(恨)으로 여겼다고 한다. 어쩌면 그 응축된 한이 에너지가 되어 수많은 절창(絶唱)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허균ㆍ허난설헌 기념관 033-640-4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