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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 정체불명의 명배우 황정민론

피나얀 2005. 10. 17. 17:43

                            

 


출처-[필름 2.0 2005-10-15 18:50]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2005년이 발견한 배우는 단연 황정민이다. 매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러나 언제나 무심한 듯 폭발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그는 분명 낯설게 기분 좋은 배우다. 자신의 열 길 웅덩이로부터 끊임없이 길어올리고 있는 무엇. 황정민을 말한다.

스타 배우는 소모되는 존재다. 우리가 어떤 배우를 좋아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배우의 특정한 면을 부각시켜 그것만 좋아한다. 그 배우는 우리에게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보여준다. 만약 그가 다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면 그는 한 순간이라도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저건 우리가 원하는 그의 모습이 아니야”라고 우리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변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거꾸로 그가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면 우리는 “그는 너무 발전하지 않아. 늘 그대로야”라며 마치 몸과 마음 단장에 게으른 애인을 대하듯 한다. 이렇게 변덕스런 이중의 욕망 사이에서 배우는 소모되기 쉬운 존재다.

그런 면에서 황정민은 아직 소모되지 않은 배우다. 뿐만 아니라 어디로 소모돼야 할지 관객들도 아직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다음 영화로 넘어갈 때 변화의 폭이 너무 커 심지어 때로는 그가 과연 그인지를 모르고 넘어간 적도 있었다. 그의 영화 데뷔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맘씨 착해 매일 당하고만 사는 드러머 강수 역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황정민이 아니라 그냥 불쌍한 아저씨 드러머로 기억했다. 그랬던 그가 <로드 무비>에서 갈기머리를 한 강인한 게이 대식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을 연기한 배우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자그마한 놀라움을 줬다. 에선 부잣집 유약한 도련님 광태로 나와 화면 구석에서 어른거리는, 잊을 만하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조역을 맡아 그냥 그런 플롯의 도구로 잊혀졌다. <바람난 가족>에선 꽤 세련된 중산층 변호사 주영작 역을 맡아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크기 않은 쿨한 인물의 내면을 연기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끝이 없다. <마지막 늑대>에선 어리숙한 강원도 경찰로, <달콤한 인생>에선 사악하기 그지없는 깡패로, <천군>에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남한군으로, <너는 내 운명>에선 얼굴과 몸 전체가 퉁퉁 불은 시골 총각으로, 곧 개봉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선 사투리를 쓰는 순진한 마초 형사로 나온다. 어느 쪽으로도 배우 황정민의 이미지는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어떤 역할을 해도 그는 맡은 인물을 황정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습자지처럼 그 역할에 스며들어 자기 존재를 지운다. 그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 같은 존재감에 관객이 익숙해지기엔 꽤 시간이 걸렸다. 짧은 기간에 적지 않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이름값을 새기는 대신 두터운 역할의 인명록을 만들었고 한걸음에 달려온 듯 보이는 순간, 점점 또렷이 각인된 배우 황정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러니 그는 황정민이라는 존재감을 아직까지 소모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관객들에게 쓱 다가와 존재를 알려주고 잊혀질 만하면 다음 영화에서 잊지 않으셨나, 나는 황정민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 그동안 우리는 적어도 10번은 웃고 울었다. 그의 연기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이에 그가 미필적 고의로 우리의 감정을 진동시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제부터 그걸 다시 한번 기억해볼 차례다.

황정민이 자신의 육체로 말하는 것

언젠가 사적인 자리에서 딱 한 번 그와 술을 마셨을 때 그는 도무지 배우 같지 않은, 투명 인간 같은 태도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배우들에게서 곧잘 보이는 자리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말없이 앉아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그는 과묵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뭔가 말하고 웃고 대화 자리에서의 감정 온도를 높이고 있었으나 한 번도 도드라져 보이는 순간이 없었다. <로드 무비>의 과묵하고 내적으로 강인한 캐릭터를 봤던 직후라서 그 조용하고 부드러운 존재감이 신기해 보였다. 그때는 그것이 막 주목받기 시작한 연극 출신의 신인 배우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흔한 겸손의 태도이겠거니 했다. 몇 년 후 좀 더 그가 이름이 났을 무렵에 서울 시내 어느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는 주말에 데이트를 나온 평범한 대학원생 같은 옷차림을 하고 활기 차게 걷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걸어다녀도 되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나, 라고 물었더니 웬걸요, 아무도 못 알아봐요, 난 늘 지하철 타고 다녀요, 좋잖아요? 라고 반문했다.

<로드 무비>에서 3,4년의 시간이 흐른 동안 황정민은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던 배우였다. 사람들은 그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출연 횟수는 늘어났고 덩달아 스크린에서 그를 볼 기회도 많아졌다. 그런데도 그는 홀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메주를 콩이라고 우기는 거품의 시대에 그의 변치 않는 거리 활보는 낯선 감흥을 줬다. 그는 영화에 열심히 출연하고 있으나 자신을 투명 인간처럼 대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신통력을 지닌 인간처럼 여겨졌다. 그건 그가 습자지와 비슷한 연기 패턴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연기하는 꽃미남 계열의 스타 배우가 아니다. 그에게서는 역할에 앞서 자기 존재를 심는 완연한 나르시시즘의 자취가 없다. 그의 얼굴에서 대중은 거울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는 어떤 역할을 하더라도 신들린 듯이 연기함으로써 자기화시키는 무당 같은 신통력을 발휘하는 그런 연기파 배우도 아니다. 감정의 데시벨이 보통 사람보다 열 배는 더 높아 보이는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와 같은 배우의 반열에 위치하는 연기파 배우라고 보기엔 그의 연기는 굳이 열연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선우와 대립하는 경쟁 조직의 중간 보스 백 사장 역을 황정민이 연기할 때, 회의실로 향하는 문을 몇 개 통과하며 약간 거들먹거리는 듯, 과시하는 듯, 좀 불안정한 듯, 약간 꾸부정한 듯이 그가 걸을 때 배우 황정민은 지워진다. 거기엔 완벽하게 재창조된 백 사장이 있었다. 외부 세상에 대해 무심한 듯 자기 멋대로 지껄이고 행동하지만 그게 실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세심하게 계산해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을 그 영화에서 백 사장으로서 드러낸다. 친구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는 것을 알고, 비록 그가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너무 슬퍼 엉엉 우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와는 정반대 인물이 <달콤한 인생>에 있다. 약속 장소에서 자기를 불러낸 상대가 복수하러 온 선우라는 걸 알게 되자 당황한 척 어, 어 하는 소리를 내며 겁먹은 듯 난감하게 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난자하는 이 비열한 인물의 육체적 지표가 화면에 전시되는 쾌감은 악인에 대한 경계를 넘어선 그 자체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주인공과 대면하게 된 악당의 모습은 숱한 영화에서 봤던 것이다. 그는 상대의 경계를 늦추며 자기 방어 궁리를 한다. <달콤한 인생>에선 정반대다. 그 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선우가 너무 갑작스레 당한 상대의 칼질에 놀라 멍하니 자기 몸에 배어나는 피를 볼 때의 심정처럼 그 장면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백 사장 캐릭터의 느닷없는 공격성이 그랬다. 이 자는 한 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인간이다. 같이 오줌을 눌 때조차 오줌을 누면서도 칼을 꺼낼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무슨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이 10년 지기라도 만난 듯 살갑게 대하는 척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황정민의 흡입력은 바로 그런 인물을 하나의 눈짓, 손짓, 헤벌린 입술 모양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런 육체성의 전시 능력에 있다. 이는 상당수의 영화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해 쩔쩔매는 순진한 인간으로 나왔던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던 우리가 <달콤한 인생>과 같은 악당 역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수라 백작처럼 그는 이 영화, 저 영화에서 다른 육체성을 보여 준다. <바람난 가족>에서 단단하게 껍질이 포장된 자아를 지닌 변호사 역의 그는 좀처럼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쁨, 외로움, 슬픔조차도 적당히 다스리는 인간이다. 이북 출신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피를 토할 때도 얼굴에 짜증을 묻혀내면 그만이다. 그랬던 그가 아주 잠깐, 아들이 죽고 난 후 아내에게 감정을 드러낼 때 욕을 하고 따귀를 올려붙인다. 아내가 자신의 구타로 다치자 그는 금방 평상 시의 이성적인 말투로 돌아가 그녀의 몸을 염려한다. 마치 도화지를 뒤집는 듯한 인간성의 경쾌한 조율 능력은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결별을 확인한 후 발레하듯 공중에 두 발을 부딪치는 동작에서 '상쾌하게 안녕!'이라는 느낌을 전해준다. 힘겹게 육체를 껴안고 있는 모든 가부장제의 부담이 이제는 완전히 안녕이라는 듯 보인다. 앞으로 삶이 행복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안녕이라는 것이다.

절실하게 돌파한다

자신의 존재에 도장을 찍지 않고도 경쾌하게 맡은 역할에 흡수돼 가는 산뜻한 적응력은 상업적으로는 결격 사유일지 모르나 배우에겐 축복이다. 황정민에게선 어떤 역할을 맡겨도 거부감이 생길 정도로 관객의 방어막이 형성되지 않는다. 무색 무취의 천하무적 돌파력으로 그는 어떤 역할에도 적응해 왔다. <너는 내 운명>에서의 석중은 그런 면에서 황정민이 굵은 스타로 발돋음할 수 있는 기회이자 배우로서 하나의 짐이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황정민은 비로소 그가 아니면 감염시킬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매력의 신호를 관객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는 주로 그 역할에의 몰입을 통해 감탄하게 만드는 전문적인 능력에 완벽하게 동화돼 있었다. 그는 극중 인물로 기억되지 배우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런 그가 <너는 내 운명>에서 서서히 황정민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무모하게 에이즈에 걸린 다방 레지를 사랑하는 시골 총각으로 나오는 그는 보통 사람의 심성으론 감당하기 힘든 인간의 면모를 자신의 존재에 삼투시켜 설득해낸다. 여기서도 불거지는 것은 그의 육체성이다. 날렵한 면모를 완전하게 지워버린 퉁퉁한 얼굴과 몸매로 그는 좋아하는 여자의 손수건에서 나는 화장품 냄새에 취해 어쩔 줄 모르는 남자로 나온다. 이 원시적인 인간의 투박성은 스크린에 그가 재현한 딱 그만한 부피의 체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열연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채로 연기를 한다.

임순례, 김인식, 구자홍, 김지운, 박진표 등의 감독이 건져낸 황정민의 매력은 역할에 가려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의 존재감에서 서서히 자기 형체를 갖춰가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너는 내 운명>에서 거의 처음으로 황정민은 본받고 싶은 인물을 연기했다. 그것은 아무도 본받고 싶어 하지 않는 누추한 인간에게서 본받고 싶은 인간성의 승리를 끌어내는 이 영화의 극적 장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때까지 황정민은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을지는 모르나 본받고 싶은, 또는 대리해서 스크린 속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인물로 나오지는 않았다. 인간의 고통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끌어안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너는 내 운명>이 황정민의 출연작 가운데 가장 동질감을 느끼는 통속극의 본질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황정민은 수줍게 사랑하는 여인의 몸을 만지는 숫총각에서, 갑작스레 시련을 겪고 10년은 늙어버린 불행한 유부남에서, 결국 제대로 말하지 못할 만큼 몸이 망가지는 절망적인 남자로 서서히 변신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지난 영화에서 했던 온갖 역할들의 감정의 주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우직한 성품을 갖춘 <와이키키 브라더스> 인물에서, 어리석고 나약한 구석이 있는 인물에서, 순진함으로 주위의 호감을 사는 <마지막 늑대> 인물에서, 사회적 약자로 몰려 감정을 자기 안에 묶어두는 정신적 유배자의 위치에 처한 <로드 무비> 인물을 교대로 오간다. 웃고 울고 감정의 고저와 강약이 심하게 부침하는 이 변화무쌍한 인물을 통해 황정민은 비로소 ‘지금 이 역할을 연기하는 이 배우는 누구인가’라는 새삼스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무식하지만 힘이 세고 순박한 형사로 나오는 황정민은 그런 점에서 막 대중적인 이미지를 노출하기 시작한 배우가 막 소모되기 시작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가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보아온 관객들에게는, 압도적인 호감을 주며 화면을 장악한다. 천방지축인 성격으로 매력적인 신경정신과 의사와 연애를 할 때 그는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늘 상대에게 당하는 채로 자신의 매력을 전염시키는 특유의 인간적인 온기로 역할에 두께를 입힌다. 이 친밀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친밀감에서 그는 자그마한 감옥을 느낄 것이다. 연기 기교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투영시켜 세상으로부터 굳이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아도 영화 속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자연스러움이 이제부터는 거둬지지 않을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웃기고 친근감을 주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매력을 풍기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봐왔던 그의 이미지를 다시 확인하는 듯한 기시감을 준다. 영화가 요구하는 전형성에 자신의 이미지를 서서히 적응시키는 그런 기미가 나타난다.

이는 물론 거리끼거나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다. 채플린은 일생 동안 같은 이미지의 방랑자를 연기했다. 마를렌 디트리히는 언제 봐도 마를렌 디트리히다. 그렇지만 황정민에게 소모되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전혀 그 존재감을 눈치 채지 못하는 투명 인간적 자연스러움이다. 그것은 가식으로 감춰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뭐라 해도 스스로는 충분히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일종의 초연한 배짱 같은 것이 그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정민은 감추는 것이 보여질 때 폭발력이 있는 것을 증명하는 배우다. <너는 내 운명>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그가 연기하는 석중은 우발적인 자살 기도로 식도를 다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매불망하던 은하를 감옥에서 힘들게 면회한다. 그에게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준비한 은하는 냉담한 어조로 석중을 힐난하며 정을 뗄 수 있는 온갖 험한 말을 내뱉으며 그를 외면하려 한다. 그때 석중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려 하지만 드러낼 수 없다. 겨우 과거에 은하의 전 남편을 쫓으며 받아냈던 각서를 보여 주지만 은하의 핀잔만 들을 뿐이다. 거기에는 은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보호하겠다는 석중의 다짐이 쓰여 있다. 은하에게 그 말은 사랑의 확인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은하가 등을 돌려 면회실을 나오려 할 때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석중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나오자 비로소 은하는 사태의 전말을 눈치챈다. 그는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는 석중의 일시적인 육체적 불구상태에서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강제로 방해된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은하는 울고 석중은 울부짖는다. 그렇게 그들은 짐승의 단말마처럼 교환한 감정의 끝에서 다시 사랑을 확인한다.

이는 황정민이 그동안 보여 주었던 연기의 본질적인 매력과 통하는 감정의 전달 방식이다. 그는 늘 구석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채 묵묵히 여인을 짝사랑하는 남자를 닮았다. 직접적으로 여자들에게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 남자로 나온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YMCA야구단>에서는 물론이고 <마지막 늑대>에서도 자신이 꿈꾸는 것 외에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접수하지 못하는 어눌한 인물로 나온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 보내며 다시 만나지 말자고 이를 악물고 다짐하는 <로드 무비>에서의 대식도 자신을 믿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에게조차 최소한의 가장으로서의 온기도 입혀주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의 매력은 바로 스스로 폐쇄한 이 무구함을 누군가가 알아줄 때 폭발하면서 전염된다. <로드 무비>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해도 되냐고 힘들게 그가 말할 때, <너는 내 운명>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면회실의 쇠창살을 부수려 할 때, 다른 사람이라면 과장된 전형적 연기로 보였을 감정이 황정민의 육체를 통해서는 육친의 비극을 보는 듯한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그건 그가 그때까지 너무 많이 감춰두거나, 보여 줄 수 없었거나, 아니면 그만의 방식으로 보여 줬는데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거나 어느 쪽의 하나다.

그가 마주친 영화배우의 운명

이 눌러넣은 감성의 폭발을 한 인간의 삶에 채워넣는 황정민식 연기의 매력이 대중 영화의 전형적인 공식 속에서 익숙한 이미지로 소모될 때 황정민은 비로소 영화배우의 운명과 맞서 겨루기 시작할 것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 황정민은 지금까지 자기 존재를 온전히 노출시키지 않은 채, 비장의 카드를 감춰둔 채 적당한 지점에서 그걸 꺼내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남자의 진심을 알아차린 연인이 비로소 그의 존재를 각인시켰을 때 그는 그늘에 감춰두었던 자신의 전 존재를 노출해야 한다. 계속 순진하면서 동시에 멋있어 주길 바라는 대중이라는 연인 앞에서 황정민은 본격적으로 배우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게 꼭 걱정되지는 않는다. 실은 아마도 그는 아직도 감춰둔 게 더 많은 배우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자기 삶에서 가식을 걷어낸 채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수월하게 주변 것을 관찰하고 채집하는 활달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그는 수줍은 본색을 깨트리지 않고 앞으로도 자기 것의 어떤 부분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모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배우의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황정민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스타 배우의 계보에 자기 이름을 등재시키고 영화 산업의 한 축에서 유능한 감독들과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갈 것이다. 그런 그에게 투명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보여줬던 그간의 행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아마도 그는 튼튼한 외투를 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외투는 얼핏 너무 평범한 것이어서 쉽게 눈치챌 수 없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가 외투를 벗고 꺼이꺼이 울거나 히히덕거리며 웃을 때 상대방도 따라서 자연스레 그 기쁨과 슬픔의 감정 농도에 감염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지금까지 황정민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예외적인 지점에 그를 바라보던 우리를 데려다놓곤 했다. 이 남자,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릴 울릴 준비를 하고 있는 남자다. 그의 연기의 예외성은 그가 삶에서 꾸리고 있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투명 인간이여, 그 투명한 기색을 잃지 말아 주시오.

김영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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