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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 [2050여성살이] 대한민국 장남들의 생애에 경의를

피나얀 2005. 11. 30. 18:23

 


 

 

[한겨레]

동갑내기 남편의 만 오십 생일.

 

올해는 뭘 선물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딸린다. 대한민국의 멀미나는 현대사 반세기를 살아냈으니 응당 기념할 말한 이벤트나 선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요 몇 년 동안 남편 뒷머리 숱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아직은 앞머리카락이 많아 태연한 척하지만 어찌 초조하지 않을까? 홈쇼핑 베스트셀러라는 ‘백만개의 머리카락’ 제품이라도 선물해야 할까? 슬쩍 뿌려주면 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른 것처럼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한다고 들었다. 머리 숱이 많아 지는 건 아니지만 심리적 안정을 주는, 훌륭한 상품인 것 같다.

 

그리 건강한 편이 못되는 남편은 총각 시절부터 무좀과 치질에 시달렸다. 30대 후반엔 벌써 백내장으로 한쪽 눈에 인공 안구를 박아 ‘터미네이터 아저씨’가 되었다. 40대 후반엔 당뇨 판정. 대한민국형 마른 당뇨로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는 전문가의 진단이다.

 

남편은 장남이다. 대한민국 장남은 그냥 태어나는 게 아니라 점지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시아버지께서 회갑 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는 위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모두 미혼인 다섯 여동생을 둔 장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세 번의 장례식과 다섯 번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남편은 그리 다정한 아들이나 오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장남직을 성실히 수행해 낸 수 많은 중년 남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 모두 때로 무한책임에 가까운 그 직책에 염증을 느껴 부당함을 하소연하고 싶지 않았을까?

 

어깨에 짊어진 그 직책의 무게를 생각하면 대한민국 장남들은 모두 오십견에 걸릴 것만 같다.

 

장남인 남편 덕분에 맏며느리가 된 나는 결혼생활의 첫 10년을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맏며느리라는 보직 또한 만만찮은 긴장과 경제적 부담, 그리고 신경 소모를 요구한다. 남편에게 짜증내고 화풀이 해대기를 아마 골백번도 넘게 했을 것이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만 전의를 상실했다. 다른 모든 대한민국 장남들이 그러하듯 맏아들로 태어난 건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남편의 생일상을 차렸다. 요리 수준의 음식상을 차릴 실력은 아니지만 가정식 백반에 관한 한 나름대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평하는 나. 햇콩과 보리 섞은 밥에 미역국, 명란 박은 계란찜, 자반 고등어 구이, 김과 겉절이 김치, 그리고 보리새우와 함께 볶은 호박 나물, 경상도식 콩잎절임을 올렸다.

 

축하 사절단으론 멀리 있는 시댁 식구들 대신 가까이 사는 친정 엄마와 남동생 내외가 왔다. 친정 남동생 또한 외아들인데, 남편과 동생 사이엔 말 없는 동지애와 연민이 있다. 우린 그날, 즐겁게 먹었다. 보직을 장엄하게 수행하는 그 두 외아들 또는 장남들의 생애에 경의를 표하며.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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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2005-11-30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