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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통통한 다리도 행복하던 부츠컷의 시대는 가고 몸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가 트렌드…남자는 스트레이트 실루엣이 여전한 인기, 살이 없을수록 어울리는 것은 만고불변
▣ 심정희
‘아아, 랩이나 춤에 소질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재주를 갖고 태어났다면 래퍼나 B-Boy가 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트렌드에 관계없이 1년 365일 헐렁한 배기 팬츠를 입고 다닐 수 있었을 텐데.’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쿰쿰한 땀냄새가 진동하는 스포츠센터에서 레그프레스(보기 좋은 근육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다리 선까지 예쁘게 정돈해준다는 아주 기특한 기계다!) 곁을 맴돌고 있으려니 그야말로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레그프레스는 셀룰라이트로 똘똘 뭉친 ‘우량한’ 몸매의 아주머니가 벌써 15분째 독점 중.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로 보아 스태퍼 위에서 엉덩이를 실룩대고 있는 늘씬한 아가씨와 분홍색 덤벨 양손에 들고 러닝머신 위를 느릿느릿 걷고 있는 아가씨 역시 레그프레스가 빌 때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 다음 차례를 그녀들에게 뺏길세라 레그프레스 바로 옆에 서서 10분째 맨손체조 중.
부츠컷, 간신배 와이드 진보다 현명한
아줌마 참 눈치 없다.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하나 오로지 살을 빼보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저 아주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애초에 우리 모두를 이렇게 만든 건 케이트 모스(얼마 전 한 타블로이드 신문에 코카인을 흡입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스타일을 완전히 구기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이다)인 걸.
케이트 모스가 엉덩이에서부터 발목까지, 마치 레깅스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스키니 진 차림으로 전세계를 누비지만 않았더라면, 또 그녀의 그런 모습이 인터넷과 패션 잡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빅토리아 베컴 같은 패셔니스타들마저 그녀를 흉내내는 불상사(?)가 발생하지만 않았더라면 주말을 앞둔 이 시간에 스포츠센터가 이토록 북적대는(그것도 특히 레그프레스 주변만) 불상사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을.
스키니 진 차림의 케이트 모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들은 이번 시즌 너도나도 앞다투어 스키니 진을 내놓았고, 날씬한 다리를 가진 여자들은 ‘낼름’ 그것들을 자신의 옷장으로 옮겨다 놓았다. 곧고 날씬한 다리를 가지지 못한 여자들은? 이렇게 레그프레스 앞을 서성이거나, 울룩불룩한 다리를 그 좁디좁은 바지통에 억지로 끼워넣느라 아침마다 지각을 하거나.
애초에 값싸고 질긴 작업복이었던 청바지가 ‘필수 스타일 아이템’으로 둔갑하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걸치고 반항기 어린 눈빛으로 카메라를 째려보던 제임스 딘이나 꼭 끼는 청바지에 하이힐을 신고 즐겁게 춤을 추던 올리비아 뉴튼 존(<그리스>에서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같은 이들이 없었더라면 청바지는 지금도 작업복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텐데.
아, 아니다. 레비 스트라우스가 청바지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애당초 이런 일은 생겨나지 않았을 테지. 스트라우스가 진을 이용해 청바지를 만들게 한 건 그 누구라더라? 그 누군가 스트라우스에게 천막 천 납품을 의뢰해놓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라던데 그럼 가장 최초에 단추를 잘못 끼운 사람은 그 의뢰인인가? 아아, 정말 별 생각을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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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한벌이 30만원이
넘는다고?
우리같이 통통하고 곧지 못한 다리를 가진 사람들에겐 지난 몇 년이 황금기였다. 지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통기타를 손에 들고 “하늘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라고 노래하던 존 레넌이나 방글라데시 돕기 콘서트에 열정을 쏟던 시절의 밥 딜런이 생각나게 하는 부츠컷 라인 청바지가 가장 트렌디한 것으로 여겨졌고, 허벅지까지는 꼭 끼고 무릎 아래부터 통이 넓어지는 그 바지들은 뚱뚱한 허벅지는 타이트하게 조여주면서 곧지 않은 종아리는 완벽하게 가려주었으니까.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 여대생들의 교복과도 같았던 와이드 진(일명 ‘고소영 바지’라 불리던 통바지)보다도 훨씬 감쪽같았다. 체형의 모든 결점을 가려줄 것처럼 굴지만 날씬한 사람은 더욱 날씬해 보이게 만들고, 뚱뚱하고 짤막한 사람은 더더욱 ‘땅딸해’ 보이게 하던 간신배 같은 와이드 진보다 열 배는 더 관대하고, 스무 배는 더 현명했다.
워싱이 제대로 된 부츠컷 스타일 프리미엄 진 한 벌이면 새로 옮겨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러 갈 때도(물론 ‘패션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맨해튼에서 가장 물이 좋다는 클럽에서도, 파리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사람들만 모였다는 파티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는데….
프리미엄 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청바지 한 벌에 30만원이 넘는다고 하면(몇 년 전부터 몇몇 편집 매장들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세븐 진’이나 ‘페이퍼 데님’ 같은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수입 프리미엄 진들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 청바지들은 ‘다리를 길고 날씬해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압구정동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뭐? 청바지 한 벌이 30만원?”이라며 놀랄 지도 모르겠지만 ‘가격 대비 효용’을 곰곰이 따져보면 그다지 비싼 것도 아니다. 좀 전에도 말한 것처럼 체형에 잘 맞고 워싱이 잘된 청바지 한 벌이면 출근할 때도, 데이트를 할 때도, 파티에 갈 때도 뭘 입어야 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 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곳간에 곡식을 그득 채워놓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곳간에 1년 동안 먹을 곡식을 채워넣는 데 30만원밖에 들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남는 장사’가 아닌가! 게다가 청바지가 ‘싸고 질긴’ 아이템이었던 건 한마디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혹은 레비 스트라우스가 광산 노동자들과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100만원이 훨씬 넘는 명품 브랜드 청바지는 차치하고(지난 시즌 이탈리아 디자이너 브랜드인 에르마노 설비노에서는 400만원에 가까운 청바지를 내놓았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인과 봉제 작업을 한 다음, 수를 놓기 위해 세계 최고의 자수 기술자들이 모여 있다는 이집트 시와(Siwa) 지역에 보내서 완성했다는 이 ‘코즈모폴리턴’ 청바지의 가격은 무려 398만원.
세계에 딱 스무 벌밖에 없는 이 청바지 중 세 벌이 국내에 들어왔고, 놀랍게도 세 벌 다 팔렸다) 지금은 굳이 수입 프리미엄 진이 아니더라도 입을 만한 청바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웬만한 정장 한 벌 가격과 맞먹는 값을 기꺼이 치러야만 하는 시대가 왔다, 이 말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좀 억울한 생각이 든다. 왜 여자들만 이렇게 레그프레스 주변을 맴돌아야 하나? 전세계적으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키니 진이 유행인 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던 1960년대, 유니섹스 모드의 핵심으로 기능했던 아이템답게 시대별로 유행하는 청바지의 실루엣은 남녀 모두 비슷한 양상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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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우리나라 남자들 사이에서는 몇 년째 평범한 스트레이트
핏 청바지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파리나 런던 같은 패션의 중심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자들 못지않게 슬림한 라인을 자랑하는 청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는 트렌드세터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길이가 발목 조금 밑까지 오는 게 정석인 여자들의 스키니 진과 달리 엉덩이 중간에 흘러내릴락 말락 하게 걸쳐입어서 흘러내린 바지 밑자락이 발목 부분에서 ‘우글우글’ 주름이 잡히게 입어야 제 멋이 난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일까?
엉덩이에 엉거주춤 걸치기 때문에 바지자락이 깡총하게 정돈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배기 팬츠(흔히 ‘힙합 바지’라고 불리는)와 다를 게 없지만 밑단이 넓어서 온 동네방네를 쓸고 다니는 배기 팬츠와는 달리 스키니 진은 결코 그럴 염려가 없다.
왜? 바지통이 하도 좁아 억지로 끌어내리려고 해도 신발 굽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니까. 밀라노나 파리의 ‘옷 좀 입는다’ 하는 젊은 청춘들은 속옷이 다 보이도록(내가 지금껏 길에서 본 그들의 속옷이 주로 그레이 컬러였던 걸 감안하면, 그것 역시 트렌드가 아닌가 싶다.
어느 책이나 기사에서도 “속옷을 겉으로 내놓으려거든 컬러는 그레이로!”라는 문구를 본 적은 없지만) 엉덩이 중간까지 바지춤을 끌어내린 다음, 마치 북극 펭귄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다닌다. 태생적으로 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니 그나마 봐줄 만한데, 다리가 짧은 동양인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실루엣이 아닐 수 없다. 바지통은 또 어찌나 좁은지, 웬만한 여자들 다리도 잘 안 들어갈 지경이라면 말 다했지.
케 세라 세라, 실루엣은 돌고 도는 것
그러나 그건 외국에서도 아주 트렌드에 민감한, 극소수 남자들 이야기고 평범한 남자들에겐 여전히 통은 약간 슬림하면서 라인은 일자로 ‘똑’ 떨어지는 스트레이트 실루엣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키니 팬츠에 비하면 그나마 낫지만 이것 역시 엉덩이와 허벅지에 살이 없을수록 입었을 때 폼이 난다. 고로, 이른바 ‘오리 궁둥이’나 변강쇠처럼 튼실한 허벅지를 가진 사람은 아서라.
그러고 보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유행했던 ‘나팔 청바지’도 198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디스코 바지’도, 뚱뚱한 하체를 제법 잘 가려주었던 부츠컷 청바지도 날렵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 입었을 때 더 멋졌다는 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여자들에게나 남자들에게나 청바지를 폼나게 입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금요일 저녁의 스포츠센터에는 여자들만 우글대는 것일까? 이 시각, 틀림없이 어딘가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닭다리를 사이에 두고 맥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수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은 그토록 몸매에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 모르겠다. 스키니 진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고, 이 통통한 다리의 살들은 어지간해서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내게 선택은 두 가지. 이 황금 같은 금요일 밤, 칙칙한 스포츠센터에서 얼른 뛰쳐나가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한 다음 유행 지난 부츠컷 팬츠를 다시 꺼내 입고선 “(턱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고 15도 정도 위로 치켜올려 주어야 한다) 트렌드에 연연한다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것 아냐?”
하거나, 울룩불룩한 다리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키니 진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 20분째 레그프레스를 독점 중인 아주머니처럼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뭐 아무렴 어떠랴. 돌고 도는 인생처럼 청바지 실루엣도 돌고 도는 것. 스키니 진이 제아무리 멋있어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랬다. 케 세라 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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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21 2006-02-28 11:03]![](http://www.xn--910bm01bhpl.com/gnu/pinayarn/pinayarn-pinayar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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