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제주 중문단지 산책길] 女心잡은 사색 그리움을 띄우다

피나얀 2006. 3. 24. 00:07

 


첫사랑의 추억이 빨간색 엽서를 한 자 한 자 메운다. 유채꽃 향기보다 짙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까마득한 절벽을 오르고 클래식 선율에 취한 동박새의 춘흥은 사색에 잠긴 여심에 잔잔한 파문을 그린다. 가는 봄날이 서러운 듯 봄비에 젖어 희미해진 첫사랑의 추억이 숲속 빨간 우체통에 차곡차곡 쌓인다.

 

사색의 산책로는 제주 중문관광단지 바닷가 절벽을 걷는다.

 

제주 하얏트호텔에서 신라호텔을 거쳐 롯데호텔로 이어지는 약 1㎞의 바닷가 절벽 산책로는 수려한 경치에도 불구하고 늘 한적하다.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장소로도 유명한 산책로에 인적이 드문 것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호텔 구역이라 출입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객실 창문을 열면 중문의 청옥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하얏트호텔에서 바닷가 잔디밭으로 내려서면 산책로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다. 요트 형상의 레인보우 채플 옆에 위치한 야외수영장은 이은주의 마지막 출연작인 드라마 ‘불새’에서 가든파티가 촬영됐던 곳.

 

바닷가 절벽을 따라 나무 데크를 깔아 만든 산책로는 바람에 날려온 유채 씨앗이 드문드문 무리지어 노란꽃을 활짝 피웠다.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쉼 없이 절벽에 부딪쳐 천둥소리를 내고 돈나무 숲에선 무시로 꿩이 날개를 퍼덕인다.

 

하얏트호텔 산책로는 동쪽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뒤에서 솟는 해와 서쪽의 갯깍 주상절리대 뒤로 지는 해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명소. 한낮에는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파도를 가르는 제트보트와 돛을 활짝 펼친 요트가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산책로의 벤치는 드라마 ‘올인’이 촬영됐던 곳. 산책로는 하얏트호텔 동쪽 끝에서 중문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산책로와 신라호텔로 이어지는 산책로로 갈라진다.

 

신라호텔 숨비정원의 산책로는 숲의 닫힌 공간과 바다의 열린 공간을 교대로 조망한다.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됐던 쉬리벤치는 바다를 벗하는 열린 공간의 대명사. 3개 중 가운데 벤치가 주인공으로 두 그루의 소나무 아래 위치한 쉬리벤치와 이병헌이 묵었던 ‘이병헌룸’은 지금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쉬리벤치 앞에는 1996년 한미정상회담 후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제주의 푸른 바다와 유채꽃을 배경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던 정상 회견장. 주변에는 나지막한 돌담에 둘러싸인 유채밭에서 유채꽃이 서둘러 꽃잎을 피우고 있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 산책로는 ‘첫사랑 언덕과 우체통’이란 낭만적 이름이 붙은 쉼터에서 절정을 이룬다. 울창한 해송에 둘러싸인 호젓한 쉼터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사색에 젖거나 밀어를 나누는 연인들로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두 개의 벤치 사이에 세워진 청동함에는 빨간색 엽서와 필기구도 준비되어 있다. 엽서에 사연을 담아 숲속의 빨간 우체통에 넣으면 호텔에서 우표를 붙여 그리운 이에게 보내준다.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에게 보내는 엽서가 한 달 평균 500여 통이 접수될 정도로 인기.

 

은은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산책로를 몇 번 오르내리면 중문해수욕장으로 통하는 바다계단이 나타나고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롯데호텔 산책로가 펼쳐진다. 연분홍 복사꽃이 피기 시작한 산책로엔 크고 작은 3개의 풍차로 이루어진 풍차라운지가 이색적이다. 이곳도 영화 ‘올인’이 촬영됐던 곳으로 산책로는 이곳에서도 중문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반달 모양의 중문해수욕장은 제주도 방언으로 ‘진모살’로 불린다. 길다는 뜻의 ‘진’과 모래라는 뜻의 ‘모살’이 합쳐진 말. 검은색,흰색,붉은색,회색 등 4가지색을 띤 진모살의 모래사장엔 지우개를 자처하는 파도가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우고 또 지운다.

 

신라호텔 절벽 아래에 위치한 산책로 주변은 사구와 모래사장,그리고 절벽을 따라 온갖 아열대식물이 자생하는 식물원. 바위에 붙어사는 콩짜개란을 비롯해 순비기나무 등 30여 종의 난대성 식물이 동남아의 휴양지를 방불케 한다.

 

하얏트호텔 산책로 아래에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은 제주도의 숨겨진 비경.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둥글둥글해진 검은 현무암과 사각형 또는 육각형 돌기둥 바위들이 주상절리를 이룬다. 비록 수량은 적지만 무지개를 만드는 개다리폭포와 기묘한 형상의 바위는 한 폭의 동양화.

 

하지만 진짜 비경은 개다리폭포와 중문골프장 아래에 위치한 갯깍 주상절리대 사이의 자그마한 해수욕장. 작다는 뜻의 ‘존’과 모래라는 뜻의 ‘모살’이 합쳐져 존모살 혹은 조근모살로 불리는 해수욕장은 왕바다거북의 산란지로 밝혀진 곳이다.

 

해질 무렵 황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존모살에서 바다 품에 안겨 산책하는 여심들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드는 곳. 존모살은 자연이 만든 비밀의 공간이다.

 

 

 

 

제주=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출처-[국민일보 2006-03-23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