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촉촉한 도시 취리히

피나얀 2006. 3. 25. 00:33

 


스위스는 다민족 국가다. 국가 지정 공용어만 4개다.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만어 등이다. 삶의 영역도 각 언어권으로 세분화돼 있다. 인구의 약 10%는 외국인이다. 대학 재학생의 4분의 1, 박사 과정의 절반 이상도 외국인이다. 26개 칸톤(우리의 도에 해당)의 자치권은 상상을 초월한다. 연방정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대통령도 4개 주요 정당이 번갈아 맡는다.
 
여기서 드는 중요한 의문 하나. 대체 스위스라는 나라는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해가는 것일까. 스위스 도시 곳곳을 걸으며 채우고자 했던 나의 빈 칸은 이것이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친근함, 초콜릿과 치즈의 달콤고소함, 다목적 칼과 시계의 정교함도 아닌 바로 그 공존의 비결.
 

스위스의 각 도시에는 분수가 많다. 특히 취리히는 더욱 그렇다. 무려 1200개가 넘는다. 거의 대부분 이름 없는 분수들이다. 좁디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이내 또 다른 골목이 이어진다. 그 코너를 돌면 어김없이 분수가 나온다. 샛길로 들어서면 거기에 또 분수가 있다. 주로 16~18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마치 새 것인 양 깔끔하다. 물 나오는 입구엔 사자 문양의 금박을 입혀 놓았다. 늦추위의 고드름도 가지런하다.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모습. 취리히 시민의 분수 사랑은 신앙과도 같다.

 

분수라 해서 서울시청 앞에 있었던, 하늘 향해 내뿜는 분수가 아니다. 지상에서 1m쯤 되는 곳에 자리 잡은 물구멍에서 졸졸 흘러나올 뿐이다. 한낮에도 고요함이 감도는 골목길.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걸어가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또 다른 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수줍은 처녀가 치마의 끝자락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듯. 그 뒷모습에 발길이 끌리다 보니 어느새 구시가를 한바퀴 돌았다. 취리히 구시가의 미로찾기는 스위스 관광의 단연 백미다. 그리고 분수와 함께 호흡하기는 미로찾기의 꽃이다.

 

미로 한가운데쯤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천사 모습의 분수가 있다. 취리히 시민들이 특별히 아끼는 분수다. 이름은 에트랑제(Etranger.이방인). 천사는 평화를 상징한다. 다민족.다국적 출신의 이방인들이 한데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또 모든

분수의 물은 식용이다. 길을 걷다가 힘이 들면 누구나 언제든지 목을 적실 수 있게 하자는 게 분수를 만든 당초 취지였단다. 결국 평화와 공존의 철학은 분수에서 솟아나온 셈이다.

 

베른에도 800여 개의 분수가 있다. 취리히의 이름없는 분수와 달리 널리 알려져 있고 이름도 화려하다. 백파이프 연주자의 분수, 삼손의 분수에 식인괴물의 분수도 있다. 특히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7개의 분수 행렬이 압권이다. 반면 저 남쪽 레만호를 끼고 있는 로잔의 분수는 또 다른 맛이다.

 

독일어권인 취리히와 베른의 분수가 옛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프랑스어권인 로잔의 분수에는 고풍스러움 못지않게 현대적 분위기도 흠뻑 녹아 있다. 그래선지 튀지 않으면서도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북적이는 쇼핑가 한쪽 구석에서 한줄기 물을 내뿜는 모습이 큐피드의 천연덕스러움을 빼닮았다.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서는 시계를 차고 다닐 필요가 없다. 시내 어디를 둘러봐도 이내 시계가 보인다. 시계에는 스위스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자원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술뿐이라는 데 일찌감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곤 알프스 산골의 골방에 처박혀 기술을 연마했다.

 

그 기술력은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Z)에서만 2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초석이 됐다. 시계탑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종이 걸려있다. 종은 오랜 시간 일정한 간격으로 꼬박꼬박 울려왔다. 오전 10시는 기도 시간, 오전 11시는 주부들 식사 준비 시간, 오후 6시는 인부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오후 9시는 성문 닫는 시간…. 이런 식이었다.

 

로잔의 노트르담 대성당 종탑에도 육중한 종이 걸려 있다. 수많은 콰지모도가 이 종을 치기 위해 수백 개의 나선형 계단을 숱하게 오르내렸으리라.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시계탑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종소리는 이후 스위스인들의 동질성을 담보하는 주된 요인이 됐다.

 

지금도 하루에 수십 차례씩 종이 울린다. 매시 정각에 시침 숫자만큼. 매시 30분에 단 한 번. "땡그렁, 땡그렁." 종소리는 온종일 동네 곳곳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그러곤 거리의 분수들을 소리없이 휘감는다. 그렇게 분수와 종소리는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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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중앙일보 2006-03-24 0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