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동양의 나폴리 통영 앞바다엔 미륵도가 있다

피나얀 2006. 4. 6. 01:15

 

 

▲ 동양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 이 복작복작한 도심지에서 연육교나 해저터널을 걸어 건너면 미래의 땅 미륵도입니다.
ⓒ2006 임윤수
'당장'이라고 하는 현실도 어제에는 내일이라는 미래였으며, 내일엔 어제라는 과거가 됩니다. 그러기에 현실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갖기도 합니다. 정말 "어~"하다 보면 지금은 이미 저만큼 흘러간 과거가 되어있습니다. 세상에 멈춰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세월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니 우리네 인생도 흐를 뿐입니다.

가끔 멈춘 것이 있지만 그건 이미 죽은 것입니다. 고인 물이 썩고 정지한 사고가 부패하듯 멈춘다는 건 이미 존재의 끝남을 의미하거나 예고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현세의 한평생이란 셈 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일 수도 있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당장의 찰나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란 게 참 묘한 힘이 있습니다. 지나고 보면 그립고 즐거웠던 지난날 추억도 그때 당장엔 그리울 수도 즐거울 수도 없었던 일들이 많습니다. 힘들거나 고통스러웠던 일, 죽음을 고민할 만큼 괴롭거나 갈등하던 일, 당장의 끼니를 걱정 할 만큼 버겁던 그때의 가난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아련한 추억으로 그립도록 아름답게 각색되거나 채색되어 버립니다. 시간엔 한마디로 정의할 수없는 묘한 뭔가가 있습니다.

 

▲ 미래의 땅 미륵도로 들어서지만 과거 없는 현실은 있을 수 없음을 상기하라는 듯 과거불인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함을 알리는 글귀가 보입니다.
ⓒ2006 임윤수
시간이 가지고 있는 묘한 뭔가에는, 시간이 흐르면 좀 더 여유롭고 넉넉해지는 보편성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은 정말 살기 바빠 정신없던 그때를 돌아보며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지금이 그때보다는 분명 풍부해 졌는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말들을 하게 하는 그 이면엔 반드시 흘러간 시간이 있으니 시간이야 말로 여유와 넉넉함을 담보해 주는 묘약중의 묘약입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리네 현세의 삶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윤회의 간이역일지도 모릅니다. 잠시 멈춘 간이역에서 우리들은 가락국수를 먹으며 포만감을 느끼기도 하고 주변 풍경에서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끔은 머뭇거리다가 출발하는 기차 놓칠까 잰걸음으로 달리며 마음을 졸이기도 하듯 우리네 현세가 꼭 간이역을 닮았습니다.

 

 
▲ 여느 절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아쇼카양식의 원주석탑에는 7과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2006 임윤수
노랫말처럼, 사랑에 속고 돈에 울며 일희일비하다 보면 혈기왕성한 청춘은 저만큼 흘러간 옛일이 되어버립니다. 권력과 명예를 좇다보면 권력과 명예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종속된 초라한 자화상만 남기기 쉬운 게 현실이며 인간들의 한계일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끊임없이 미래를 이야기하고 동경합니다. 기약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현실보다는 미래가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믿음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믿음 뒤에는 그동안 경험한 '시간이 만들어 주는 여유와 넉넉함'이 계속될 거라는 관성의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남도를 연결하는 통영 앞바다에는 미륵도라는 섬이 있고, 미륵도 미륵산엔 용화사가 있습니다. 국내의 많은 섬들 중 유일하게 해저, 해상 그리고 연육교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섬이 미륵도입니다.

불가에서 미륵(彌勒)이란 현세불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하고 56억7천만년이 지나면 도래할 미래의 부처님을 일컬으니, 미륵도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이 주석할 미래의 땅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치하 때 건립되었다는 해저터널이나 두 곳에나 놓여있는 연육교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미륵도는, 통영의 150여 크고 작은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라고 합니다.

해저터널을 통해 걸어 들어가든, 차를 가지고 연육교를 건너 들어가든 용화사엘 가기 위해서는 10여분 정도쯤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통영 사람들은 좋겠습니다. 다리 하나만 훌쩍 건너면 미래의 땅에서 과거가 된 현세를 뒤돌아보며 여유와 넉넉함을 만끽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가난과 고통, 번민과 갈등조차도 아름답게 채색해주는 시간까지는 담보해주지 않더라도 미륵도의 그 수려함이 고달픈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휴식처로 느껴질 테니 부럽기만 합니다.

 

▲ 정면에 보광전이 있고 오른쪽 탐진당과 왼쪽의 적묵당이 두 팔 벌린 어머니 품을 형성하고 있으니 경내로 들어서는 발길에 푸근함이 느껴집니다.
ⓒ2006 임윤수
통영 도심지서 다리 하나만 건너는 용이한 접근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바다와 어우러진 풍광이 뛰어나니 그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로 주차장이 혼잡합니다. 주차장까지의 풍경은 그냥 풍치 좋은 바닷가에 있는 혼잡한 도심지라고 생각하는 게 적당합니다.

그러나 주차를 하고 몇 걸음만 걸어가면 그곳은 딴 세상입니다. 관객 버글거리는 연극무대서 안막하나 제치면 혼자만의 뒷공간이 되듯 몇 걸음만 걸으면 지금껏 함께하던 그 혼잡함은 저만큼 옛일이 되어 있습니다.

산책을 하듯 들어서는 초입에 세워진 대리석 돌기둥엔 커다랗게 '南無阿彌陀佛'이란 글씨가 암각 되어있습니다. 붉은 색이 칠해져 있어 한눈에 또렷하게 들어옵니다. 진입로 양쪽엔 굵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습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저수지를 지나 10여분 그렇게 걷다보면 용화사로 들어서게 됩니다. 용화(龍華)란 미래부처님이 하생할 장소를 가리키니 이곳이야 말로 도솔천에 머물던 미륵부처님이 하생(下生)할 탄생지가 된다는 말인가 봅니다.

 

▲ 보광전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에는 동자승상이 놓여있습니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중생들의 삼독이라고 하는 탐진치와는 아랑곳없는 해맑은 모습들입니다.
ⓒ2006 임윤수
용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632~646) 은점화상(恩霑和尙)이 정수사(淨水寺)라는 절로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1260년, 고려 원종(元宗) 원년, 폭우에 따른 산사태로 가람전체가 폐사되어 3년 뒤 자윤(自允), 성화(性和) 두 스님이 자리를 옮겨 절을 복원하며 절 이름을 천택사(天澤寺)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628년, 조선 인조(仁祖) 6년에, 화재로 다시 전소 된 것을 벽담선사(碧潭禪師)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며 절 이름을 용화사로 하니 그 절이 현재의 용화사라고 합니다.

절 이름이 천택사에서 용화사로 바뀐데 따른 설화가 있습니다. 화재로 전소된 천택사를 복원하기 위해 벽담스님은 미륵산 제일봉 아래에서 칠일밤낮 동안 미륵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칠일밤낮이 흘러 기도를 회향하는 날 꿈인지 생시인지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는 당래교주미륵불(當來敎主彌勒佛)이니라. 이 산은 미래 세상에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될 도량이니 여기에 가람을 짓고 용화사라 하면 만세에 길이 보전되리라"라고 하더랍니다.

 

▲ 햇살 가득한 적묵당 섬돌엔 뽀얗게 닦아진 흰색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2006 임윤수
이 서몽을 따라 장구한 세월, 360여 년 동안 사용하였던 천택사라는 절 이름을 용화사로 바꾸게 되었다는 설화입니다. 이렇게 중창된 용화사가 현재까지 별다른 재난 없이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귀의처가 되고 있으니 설화에 담긴 현몽이야기가 한낱 허구만은 아닌 듯합니다.

경내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는 용화사 부도전이 있습니다. 2단으로 된 부도전에는 탑비는 물론 다양한 양식의 3층과 5층 석탑이 있습니다. 부도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용화사 경내로 들어서게 됩니다. 경내 정면에 보광전이 있고 마당 오른쪽의 탐진당과 왼쪽의 적묵당이 두 팔 벌린 어머니 품을 형성하고 있으니 들어서는 발길에 푸근함이 느껴집니다.

 

▲ 절집에서 자라고 있는 해탈이(?)도 양지쪽에 누워 봄 햇살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기만 합니다.
ⓒ2006 임윤수
용화사 큰법당은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보광전이며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 지장보살과 십왕상을 모신 명부전 등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적묵당, 탐진당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웅전과 같은 높이의 왼쪽에는 맞배지붕 전각에 출입문을 달리 해 영각과 명부전 편액이 좌우로 각각 달려 있습니다.

보광전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엔 누군가가 12개나 되는 조그만 동자승상을 얹어 놓았습니다. 빡빡머리의 동자들이 천진난만한 표정입니다. 어느 동자는 합장을 하고 있고, 어느 동자는 경문을 읽는 모양입니다. 어느 동자는 목탁을 치고 있고, 어느 동자는 소에 올라타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참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중생들의 삼독이라고 하는 탐진치와는 아랑곳없는 해맑은 모습들입니다.

경내 입구 오른쪽, 기단에는 "佛舍利四獅子法輪塔"이란 글씨가 암각 된, 조금 독특한 고대 아쇼카양식의 원주석탑이 눈길을 끄는데 7과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불사리탑이라고 합니다. 용화사에는 당대 불교계의 큰 선사이신 효봉스님의 사리탑도 경내에 있었습니다.

 

▲ 여느 절들과는 달리 7각형의 종루에 범종이 있었습니다.
ⓒ2006 임윤수
경내로 들어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7각형의 종루가 있고 종루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효봉선사의 사리가 봉안 된 석조좌상이 있습니다. 전각들은 흑색 기와와 청색기와가 어우러져 단색의 무료함을 덜어줍니다. 햇살 가득한 적묵당 섬돌엔 뽀얗게 닦아진 흰색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이따금 원색의 등산복차림을 한 등산객들이 기웃거리듯 들락거릴 뿐 용화사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종루 앞 채마전을 지나니 효봉스님 사리를 봉안한 좌상(사리탑)이 있는 곳입니다. 반배 합장하고 평편한 돌에 앉아 잠시 해바라기기를 즐겨봅니다. 햇볕의 따사로움에 서니 하릴없이 꾸벅꾸벅 졸음이 옵니다. 졸음 속에 잠시 망상(?)의 수채화를 그려봅니다.

마음을 놓으니 예가 도솔천입니다. 푸른 바다, 동백 꽃, 작은 어선, 포말처럼 떠있는 양식장의 부표들…. 이 모든 것이 미륵도를 장엄하는 예물이며 공양물입니다. 수채화 속에 용화사가 그려지고 그 용화사에 앉아 졸고 있는 행복한 모습의 아상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수채화에 등장한 행복한 아상을 꼼꼼히 들여다봅니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현실이라는 파고가 그 아상을 흔들어 버립니다.

 

▲ 종루 앞 채마전을 지나면 효봉스님 사리를 봉안한 좌상(사리탑)이 있습니다.
ⓒ2006 임윤수
미래에 도래할 미륵부처님이 하생할 용화수가 이곳이라지만 기다려야 하는 억겁의 세월에 흔들리고 다시금 고개든 삼독에 흔들립니다. '들린다고 다 소리가 아니고, 보인다고 다 사물의 본상이 아니라'고 한 효봉스님의 말씀은 지금껏 살며 보았음에도 보지 못하고, 들었음에도 듣지 못하는 수채화 속 아상을 말함인가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세월이 흘러야 미륵부처님이 출현 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미륵 부처님은 이미 우리 곁을 다녀갔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느 순간, 어떻게 다녀가셨고 다녀갈지는 모릅니다. 내일을 과거같이, 내세를 전생같이 바라볼 수 있다면 억겁의 세월을 기다리지 않아도 미륵부처님이 펼치는 구원을 얻어 용화세계로 들 수 있을 겁니다.

내일을 어제같이, 내세를 전생같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넉넉함은 엄청나게 빠른 타임머신으로만 얻어지는 게 아님은 물론 출세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각의 지붕들이 흑색과 청색으로 담백한 느낌입니다.
ⓒ2006 임윤수

아상을 버리고 아집을 놓는다면 삼세 시공을 넘나드는 건 어렵고도 쉬운 "누워 떡먹기"쯤 이 될지도 모릅니다. 시공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은 결국 아상과 아집을 버림에서 얻어 지는가 봅니다. 가던 길을 돌아 다시 나오니 그곳에 현실이 있습니다. 경적소리 빵빵거리고, 사는 소리 왁자지껄한 일상 속 현실입니다.

통영대교를 건너며 두 손을 모아봅니다. 타임머신, 56억년 시공을 넘나들 무아의 캔버스, 아상과 아집을 버린 정각의 깨우침이 미륵도 용화사엘 가면 찾을 것 같은 이 느낌 또한 삼독에 찌든 또 하나의 아집이 아니길 기원하며 미륵도를 뒤로 합니다.


덧붙이는 글
용화사 찾아가는 길
경(중)부고속도로 → 대진고속도로 → 진주 → 통영 → 통영대교 → 미륵도
650-140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404번지 (055)645-3060

이 글은 필자가 쓴 책자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에 실린 글에 사진을 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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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4-05 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