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 골목길의 녹슨 시계 바늘은 16세기를 가리킨다.
동양과 서양,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베트남 중부의 작은 도시 호이안에 발을 디디면 오수를 즐기던 수십 대의 시클로가 앞다퉈 타임머신을 대신한다. 프랑스의 자전거와 일본의 인력거가 합쳐져 탄생한 시클로에 앉아 좁은 골목으로 빨려들자 수백 년 전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다낭에서 남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호이안은 투본 강 하구의 삼각주에 자리 잡은 인구 8만 명의 항구도시. 그중 올드 타운으로 불리는 옛 마을은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844채의 고가로 이루어진 올드 타운은 참파 왕국과 응웬 왕국 이래 중국·인도·아랍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도시로 번성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땐 격렬한 전투로 도시 일부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곳이다.
마을 전체가 영화 세트장이나 마찬가지인 호이안의 고가는 재래시장에서 내원교를 잇는 약 800m의 쩐푸 거리에 밀집돼 있다. 미술품점,골동품점 등 화려한 간판으로 치장한 고가들의 유혹에 넋을 잃은 관광객들은 보물창고 안을 기웃거리고 하얀색 아오자이 차림의 베트남 여학생들은 이방인들이 신기한 듯 흘끔거린다.
호이안 역사문화박물관 앞에 위치한 재래시장은 베트남 여인들의 억척이 오롯이 배어 있는 삶의 터전. 아오자이를 걸치고 원뿔형의 논(non)을 머리에 쓴 베트남 여인들이 어눌한 영어로 호객을 하고,오토바이와 자전거에 산더미처럼 물건을 실은 여인들은 투본 강의 선착장과 재래시장을 시계추처럼 바삐 오간다.
고색창연한 쩐푸 거리는 중국 색채가 짙다. 16∼17세기 일본 무역상들이 거주하던 일본인 마을이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쇠퇴하면서 화교들이 대거 이주해 온 때문이다. 화교들의 향우회 장소로 이용되는 복건회관은 대표적인 중국식 건물.
복건회관 옆에 위치한 ‘바다의 실크로드 박물관’은 침몰선에서 인양한 동서양의 도자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약 300년 전에 지어진 꾸언탕 가(家)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민가로 베트남 통일 이후에 획일적으로 건축된 집들과 비슷하다.
1953년 일본인들이 세운 내원교는 목조 지붕이 있는 짧은 다리. 일본인 마을을 바라보는 원숭이 조각상과 중국인 마을을 향한 개 조각상이 마치 견원지간처럼 등을 돌리고 있어 미소를 짓게 한다. 내원교 옆의 풍흥 고가는 베트남,중국,일본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목조 가옥.
약 200년 전에 무역상이 지은 집으로 현재도 8대째 후손이 살고 있다. 풍흥 고가부터 이어지는 화랑가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원색의 작품들을 전시한 수십 개의 미술품점이 마치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옮겨온 듯하다.
쩐푸 거리 북쪽에 위치한 판쭈찐 거리와 남쪽의 응우엔타이혹 거리는 종일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분주하다. 이곳의 양복점이나 양장점에서 아침에 옷을 맞추면 저녁 무렵 근사한 옷이 완성된다. 베트남인들의 손재주가 돋보이는데다 가격도 엄청나게 싼 편이라 관광객들의 쇼핑장소로 사랑을 받는다.
중세풍의 호이안 거리는 밤마다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전깃줄을 비롯한 온갖 무질서한 사물들이 어둠에 묻히면 레스토랑과 카페,호텔로 변신한 고가들은 형형색색의 등을 밝힌다. 투본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박당 거리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 바이올렛 색깔의 꽃으로 뒤덮인 카페에서 흘러나온 커피향이 골목길로 산책을 떠나고 형형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투본 강은 호이안의 원색 낭만을 싣고 남지나해로 여행을 떠난다.
쩐푸 거리로 대표되는 호이안에서 만나는 동양과 서양,과거와 현대는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내부는 베트남 건축양식이면서도 외부는 화려한 프랑스풍의 고가들,핫팬츠 차림의 서양 여대생과 아오자이를 걸친 베트남 노파,최신형 일제 오토바이와 녹슨 저전거가 함께 어울려도 호이안에서는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극과 극을 조화시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한 호이안 사람들의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베트남 여인들의 운반 수단인 까인에서 찾을 수 있다. 베트남 지도를 닮은 무거운 까인을 숙명처럼 어깨에 메고도 전혀 앞뒤로 기울지 않는 베트남 여인들의 균형 감각이 호이안 문화의 원동력으로 승화하지 않았을까?
호이안(베트남)=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출처-[국민일보 2006-04-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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