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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태종대나 이기대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게 '공룡발자국'이다. 공룡이 살았다는 1억년 전이란 시간은 감당하기에
버거웠고,움푹 파인 흔적은 그저 그런 구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100년 남짓한 인생,그것을 1㎝로 잡아도 1억년이면 10㎞. '찰나'와 '영원'만큼이나 아득한 거리다. 공룡은 그렇게 멀리 있었다. 그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혀 보려는 욕심에 경남 고성으로 갔다.
먼저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고성공룡박물관부터 들렀다. 새로 단장한 제 3전시실 입구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입을 쩍 벌리고 관람객을 삼켜버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니 트리케라톱스를 사냥하는 '포식자' 드로마이오사우루스,한가롭게 풀을 뜯는 안킬로사우루스,서열 싸움에 여념이 없는 '박치기 공룡' 파키케팔로사우루스 등등의 모습이 세련되게 재현돼 있다.
더러는 공룡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알도둑' 혐의를 받고 있는 오비랩터와 뿔공룡 조상격인 프로토케라톱스의 진품 골격화석을 마저 본 뒤 상족암 공룡발자국 탐방에 나섰다.
박물관 명예관장인 서승조 교수(진주교육대)가 동행했다 고성공룡박물관에서 바다쪽으로 조성된 공룡공원 길을 따라 5분 정도를 내려가면 군립공원인 상족암이 나왔다. 들물 때는 사람 허리까지 물이 올라온다는데 오후 3시 물때에 맞춰간 덕에 바닷가는 들판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상족암에서 청소년수련원을 거쳐 덕명리 제전마을에 이르는 해안 노두(암석이나 지층이 토양이나 식생 등으로 덮여 있지 않고 직접 지표에 드러난 것)의 공룡발자국들을 차례로 훑었다. 방금 밀려왔던 것처럼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물결자국 화석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1억년 전에 이곳을 쓰다듬었던 물결이 화석이 되어 남아있다니. 노두는 따개비 굴 홍합 따위가 점령했다.
서 교수가 조심스레 호미로 따개비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따개비를 긁어내자 점차 발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1억년 전 공룡의 발자국. 물결자국 화석과 직각으로 만나는 지점에 열을 지어 발자국이 형성돼 있는데,초식공룡 23마리의 것이라고 한다.
산책이라도 나온 걸까? 단체운동회라도 열었나? 눈을 감았다. 중생대 백악기 당시 이곳은 거대한 호숫가라고 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주변에는 부채잎을 가진 소철류와 고사리 같은 겉씨식물들이 울창했다.
고사리를 뜯어먹던 이구아노돈 무리가 큰 울음소리를 내며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뚱뒤뚱 발걸음을 뗄 때마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진흙탕에 선명한 발자국이 남았다. 목이 말랐던 이구아노돈들은 한참 동안 물을 마신 뒤 5m가 넘는 몸을 돌려 되돌아갔다.
진흙탕에 남은 발자국 위에는 부드러운 퇴적물이 쌓였고,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진흙탕은 마침내 바위로 굳었다. 호수가 바다로 변할만큼 아득한 시간이 흘렀고,몇 번의 지각변동으로 퇴적암이 땅 위로 솟구쳤다. 파도는 퇴적암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그리하여 발자국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 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상족암에는 공룡 발자국도 켜켜이 쌓여 있다.
상족암에서 제전마을로 갈수록 지층은 점차 젊어지는데,이 일대 해안절벽에서 이런 식으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지층면만 329개에 달한다고 한다. 공룡 발자국이 굳어진 뒤 그 위에 부드러운 퇴적물이 쌓이고,그 위에 다시 다른 공룡 무리가 지나가면서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무려 300번 넘게 반복됐다는 말이다.
그 발자국 흔적들 중에는 네 발로 걷는 용각류와 두 발로 걷는 조각류 같은 초식공룡,날카로운 삼지창 모양의 육식공룡 수각류의 발자국까지 2천100여족이나 발견됐다. 수각류의 발자국은 갈고리처럼 생긴 발톱이 금방이라도 먹이를 잡아 찢을 듯 깊고 날카롭다. 촛대바위 앞 '공룡들의 무도회장'은 압권이다.
바닥이 움푹움푹 파인 게 오물로 뒤범벅된 돼지우리 같다. 서 교수는 "공룡들이 삐댄 곳"이라고 표현했다. 워낙 수많은 공룡들이 이 곳을 밟고 또 밟은 탓에 지층이 헝클어져 있는 것이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이곳에서 공룡들은 싸우고 교미하고 새끼도 키웠을 테다. 1억년 전 상족암에는 그렇게 많은 공룡들이 뒤엉켜 살았다.
상족암 근처 덕명마을 봉화골에는 작은 초식공룡 16마리가 육식공룡의 눈치를 보며 비스듬히 걸은 발자국이 남아있다. 마암면 두호리 대전~통영 고속도로 고성 IC 공사구간에선 행렬로 뛰어든 다른 공룡을 피해 의식적으로 보폭을 좁게 잡으며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도 발견됐다.
회화면에서는 뒷발 크기가 9㎝밖에 안되는,세계에서 가장 작은 새끼 용각류의 발자국도 나왔다. 115㎝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발자국도 보이는데,공룡박물관 앞 공룡탑의 주인공인 브라키오사우루스의 것인 지도 모르겠다. 영현면 계승사 대웅전 뒤 바위에서도,개천면 옥천사 계곡에서도 용각류의 보행열이 발견되는 등 공룡이 노닐던 곳은 엄숙한 사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런 발자국이 고성에만 5천족이 넘는다. 고성을 떠나오는 길에 며칠을 못 견디고 꽃잎을 떨구는 목련을 봤다. 꽃의 생몰연대가 그리도 짧은 목련이 놀랍게도 백악기 때부터 존재한 식물이라고 한다. 1억년을 버텨온 목련을 보면서 백악기공원에서 어슬렁거렸을 공룡을 떠올렸다. 이제 목련만 봐도 공룡이 떠오르니 고성 공룡 여행의 여진은 오래 갈 모양이다.
글=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 사진=문진우 프리랜서 moon-05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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