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선암사 뒷간에서 고향집을 추억하다

피나얀 2006. 4. 22. 19:17

 

▲ 선암사 뒷간 입구에 걸린 현판. 뒤깐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깐뒤라고 읽어야 더 재미있다.
ⓒ2006 안병기
내 어릴 적에 살았던 시골집 뒷간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누각식으로 돼 있었다. 선암사에 가 보신 분들은 알지만 선암사 뒷간 바닥은 우물마루가 깔려 있어서 쭈그리고 앉기에 그리 불편한 구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집 뒷간은 달랐다. 정식 문짝 대신 달랑 매달려 있는 가마니 한 짝을 밀치고 들어가면 마치 서까래를 깔아 놓은 듯 통나무들이 듬성듬성 걸쳐 있었다. 두 다리를 통나무에 걸친 채 쪼그려 앉으면 금방이라도 발이 미끄러져 아래로 풍덩 빠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구조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 중학교 때야 전기가 들어왔다. 밤중에는 관솔가지나 종이 따위에 불을 붙여 등 대신 사용해야 했다. 눈구멍 없는 통나무들이 사람들의 안전을 알아서 헤아려 줄 턱이 없다. 아차 삐끗 헛발을 디디기라도 할라치면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듯 분뇨통으로 풍덩 곤두박질치고 말 판이었다. 우리집 뿐 아니라 우리 동네 뒷간의 일반적인 구조가 다 그랬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뒷간에 빠져 일치감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간 어릴 적 동무도 있다.

그때마다 뒷간 귀신인 측신각시가 발을 잡아당겨 죽었다느니 몽달귀신이 잡아당겨서 죽었다느니 벼라별 소문이 돌기도 했다. 뒷간에 빠지는 게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왼종일 마당에서 죽쳐야 하는 일상의 지겨움을 견디지 못한 병아리들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한 장소로 뒷간을 택했다가 단체로 익사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 뒷간 안 풍경. 뒷간 바닥과 같은 높이에 통풍을 위한 광창이 달려 있다.
ⓒ2006 안병기
할아버지께선 뒷간 지하 1층에다가 먹돼지 몇 마리를 키우곤 하셨다. 먹돼지라곤 하지만 아마 우리나라 순수 토종돼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1904년에 발간된 <조선농업편람>과 1920년 발간된 <조선농업 연감>에 따르면 토종돼지는 '머리가 짧고 윤이나며 몸길이는 약 40cm가량'인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집 돼지는 이보다 훨씬 컸다. 내가 볼일을 보러 뒷간에 들어가면 이 돼지들이 어디서 <파리의 연인>을 봤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안에 나 있다!"라고 꿀꿀 소리를 냈다.

예닐곱 달 동안 사람들의 배설물을 받아먹고 자란 돼지들은 몸무게가 150근 가량 나가게 된다. 그렇게되면 십중팔구 돼지 장사에게 팔려 나갈 때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더러는 추석이나 설날 때 동네 추렴을 내어 잡아 먹으려고 두고 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고기 맛은 요즘에 우리가 먹는 버크샤나 요크셔, 듀록저지 같은 육질이 하얀 돼지고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았다. 돼지들과 나의 기묘한 공생관계는 내가 중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 측면에서 바라본 뒷간. T자형 건축이다.
ⓒ2006 안병기


채독과 똥독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당시에도 요소나 유안 같은 화학비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값이 비싼 까닭에 선뜻 구입할 엄두를 못냈을 뿐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 비료 공장이 충주비료공장과 호남비료공장 두 곳 뿐이었는데 이 두 곳에서 생산된 비료만으로 전국적인 수요를 충당하기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니까 사람들이 이 인분 거름이야 말로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방법이니 어쩌고 하지만 그 당시엔 화학비료가 비쌌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장을 통해 비료 구입 신청을 한다해도 신청량 그대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가령 요소비료 4푸대를 신청하면 겨우 2푸대가 나오는 식이었다.

비싼 화학비료 대신 사람들은 볏짚을 태운 재를 잿간에다 산처럼 수북하게 모아뒀다가 거름으로 쓰기도 했고 여름 내내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발효시킨 다음 퇴비로 쓰기도 했다. 때로는 인분을 퍼서 똥장군으로 져다가 거름 대신 뿌리기도 했다. 호박이나 배추, 무우 등 밭 작물에는 분뇨보다 확실하게 거름발이 나는 것은 없었다.

똥거름은 냄새 때문에 져나르기도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밭에 뿌린 후에도 문제가 많았다. 인분이 채 삭아내리지 않은 밭에서 일하다가 행여나 새참거리로 무나 배추를 뽑아 먹다가 재수없이 채독에라도 걸리는 날엔 두고 두고 고생거리였다.

채독(菜毒)이란 채소를 날것으로 먹어서 생기는 중독증을 이르는 말한다.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복통과 함께 심한 발작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인분을 뿌린 밭에서 나는 채소는 반드시 씻어 먹어야 하고, 그런 밭에서 나는 열무나 배추로는 겉절이를 해먹어서는 안 되었다. 김치를 담글 때 젓갈을 넣는 것조차도 채독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분에 섞여나온 구충이 흙 속에서 감염유충으로 잠복해 있다가 사람이 그 흙을 밟게되면 피부를 뚫고 몸 속으로 들어간다. 유충이 들어간 자리가 점점 붉어지면서 띵띵 부어오르는데 이것이 바로 똥독이라는 것이다. 밭농사를 많이 짓는 산골로 시집간 우리 셋째 고모는 이 똥독 때문에 이십여 년을 넘게 고생을 했다. 사람의 똥이 귀한 거름으로 쓰이던 시대의 슬픈 전설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가난이 아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설레발을 치는 사람들과 마추칠 때가 있다. 나 역시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장려할 사항은 더욱 아니다. 우리가 지난 1960~70년대를 그리워 하는 까닭은 가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가난하긴 했지만 결코 흐려지지 않았던 맑은 마음과 그 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던 따스한 인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내 죄의 반은 늘 식탐에 있다. 법고소리에 기름진 가죽이 함께 울고, 목어의 마른 울음 오장육부를 북북 긁고 간다. 운판 소리의 파편이 뼈 마디마디 파고들어 욱신거린다. 선암사 뒷간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근심을 버리자! 근심은 버리려 하지 말고 만들지 말아라. 뒷간 아래 깊은 어둠이 죽비를 들어 내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마음을 비우자! 마음은 처음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 벽 틈새로 스며들어온 꽃샘바람이 주장자를 들어 내 뺨을 친다.
-정일근 시 '선암사 뒷간에서 뉘우치다' 중 제 2연

시인은 '내 죄의 반은 늘 식탐에 있다'라고 참회의 말을 꺼낸다. 나 역시 시인의 참회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선암사 뒷간엔 아직도 우리들 어린 시절의 가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너무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들의 죄를 뉘우치기에는 이보다 더 안성마춤의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선암사에 갈 때마다 볼일이 없을지라도 꾸역꾸역 뒤간에 들렀다 온다. 그리운 내 유년의 정서가 1층 저 밑바닥으로부터 냄새를 풍기며 기어 올라온다. 선암사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무치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는 것은 승선교나 달마전, 원통전 같은 전각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이 뒷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암사 뒷간은 깊숙히 잠복해 있는 우리들 유년의 정서에다 핏줄을 댄 아름다운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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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4-18 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