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허공은 흩어지는 꽃잎을 다 받아주고

피나얀 2006. 4. 22. 19:49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4호 남간정사
ⓒ2006 안병기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대전의 진산인 계족산이 평지를 향해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다가 잠깐 호흡을 멈춘 듯한 낮은 산자락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다. 남간정사란 이름은 주자의 시구 '운곡남간'에서 취한 것이다. 양지바른 산골 흐르는 개울이 바로 '남간'이다.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기와집이다. 총 8칸 중 절반인 4칸이 대청이다. 그리고 앞에서 바라볼 때 왼쪽 2칸이 방이다. 나머지 오른 쪽 2칸 중 뒤쪽은 방이며 앞쪽엔 대청과 연결된 누마루가 놓여 있다. 아마 우암 송시열은 대청보다 한 층 높은 이 누마루에 앉아서 제자들 공부를 챙겼을 것이다.

남간정사의 건축방법은 특이하다. 뒤꼍 냉천이라는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건물 대청 밑을 지나서 연못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대청이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앞이 마당 대신 연못이다 보니 출입을 건물 앞이 아닌 뒤쪽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간정사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혀 작은 내삼문을 통과한 다음 '슬그머니' 뒤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려는 자의 은인자중하는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 본래는 여기서 조금 떨어진 소제동 소제방죽 옆에 세웠던 건물이나 메워지면서 건물도 차츰 허물어지게 되자 1927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2006 안병기
외삼문을 지나 우암정사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건물이 오른 쪽에 있는 기국당이다. 이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소제동 소제방죽 옆에 세웠던 우암 송시열의 별당을 옮겨온 건물이다.

소제동 기국정 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고 근처에 있던 소제방죽에다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연꽃은 군자를, 국화는 세상을 피하여 사는 것을, 구기자는 가족의 단란함을 각각 의미한다.

이곳으로 옮겨진 뒤로 기국정은 제 기능을 잃었다. 기능을 잃은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 남간정사의 불청객 노릇을 한지 오래다. 남간정사 대청마루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볼 때 시야를 가리기도 하고 사람들이 들고날 때면 거치적거리기까지 한다. 일제강점기 초에 옮겨졌다고 하지만 이 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건축물을 계속해서 이곳에 버려두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국이 원산지인 백목련, 목련은 제주도가 고향

▲ 남간정사 외삼문 옆에 자리한 목련. 벚꽃이 피기 전에 먼저 눈부신 꽃망울을 터뜨린다.
ⓒ2006 안병기
외삼문 옆 담장에는 거대한 백목련 한 그루가 서 있다. 흰 꽃이 핀다하여 백목련이라고 부르는 꽃이다. 꽃은 약간 우윳빛을 띤 옅은 노랑색이다. 원예용으로 개량된 것인 만큼 꽃잎이 크고 반쯤만 벌어진다.

목련과 백목련은 종이 다르다. 백목련은 중국이 원산지인 나무지만 목련은 제주도가 고향인 우리 나무다. 제주도 한라산 표고 1300m의 개미목 부근에는 자생 목련 군락이 있으며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백목련은 꽃받침이 꽃잎처럼 변해버려 꽃받침과 꽃잎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다 피어도 꽃잎이 완전히 벌어지지 않는다. 토종 목련은 꽃이 피면 꽃잎들이 활짝 벌어져서 꽃술이 다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백목련보다 꽃이 예쁘게 보이지 않으며 일찍 핀다. 목련은 꽃잎 안쪽에 붉은 선이 있으며 꽃받침이 뚜렷하다.

백목련이나 목련 모두 꽃봉오리들이 북쪽을 향해 굽어 피기 때문에 '북향화'라고도 불리는 모양이다. 옛 사람들은 북쪽에 계신 임금님에 대한 충절을 아는 꽃이라 하여 기특하게 여겼다 한다.

▲ 내삼문 안쪽 수줍게 피어있는 명자꽃
ⓒ2006 안병기
내삼문 안쪽으로 발을 디디면 제일 먼저 만나는 꽃이 붉은 명자꽃이다. 담벼락 가까이에 수줍은 듯 피어 있다. 정든 임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어쩌고 하는 '밀양 아리랑' 첫 대목을 연상시킨다. 중국원산 장미과의 낙엽관목인 명자나무는 관상용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꽃은 붉은색이 주종이지만 흰색과 분홍색 등 여러 가지다. 꽃이 지고나면 작은 사과 모양의 열매가 열리는데 이것이 한약 명으로 모과(木瓜)다. 우리들이 통상 모과라고 부르는 열매는 '명사' 또는 '목이'라고 부르니 까딱하면 혼동하기 쉽다.

명자나무에는 여기 저기 가시가 달려 있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명자나무의 자존심 선언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밥 '박태기나무'

▲ 박태기 나무. 찬란한 자주색 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2006 안병기
박태기나무는 수형이 그리 크지는 않은 나무다. 높이는 3∼5m까지 자라며 가지는 약간 흰빛이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데 마치 밥알이 붙은 것처럼 따닥따닥 핀다.

꽃줄기가 없고 작은 꽃자루는 붉은빛을 띤 갈색이다. 홍색을 띤 밥알 크기의 자주색 꽃이 핀다. 박태기나무란 말이 밥테기(밥알의 전라도 방언)에서 유래한 말이라면 세상 천지에 이보다 더 황홀한 밥 색깔이 있을까.

그렇다고 박태기꽃 같은 황홀한 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노동의 가치를 알고 정직한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줄 아는 사람들의 밥이 저렇듯 찬란하지 않겠는가.

▲ 남간정사 뒤안의 샘 '냉천'
ⓒ2006 안병기
냉천이라는 샘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벚꽃 잎들이 물 위에서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멈춘 듯 멈추지 않은 듯 유유자적 떠다닌다.

샘물 전체가 고스란히 하나의 수틀이다. 일개 나무에 지나지 않는 벚나무지만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랑의 형태를 수놓고 싶었을까. 벚나무는 샘물 위에다 꽃잎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를 놓는다.

벚나무의 숨은 사랑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처음 알겠다. 앞으로 꽃잎을 바라볼 적에는 나무의 사랑인 줄 미루어 알고 더욱 존중하리라.

▲ 남간정사의 지붕
ⓒ2006 안병기
먼발치서 바라보면 벚꽃 핀 남간정사는 하얀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건물은 이 난데없는 호사가 여간 껄끄러운 모양이다. 자꾸만 자신의 머리칼에 달라붙은 벚꽃 잎을 떼어내고 있다.

어느 계절보다 봄이란 계절은 도취하는 계절이다. 만화방창한 꽃들에게 도취하고 살포시 돋아난 어린 새싹들에게 도취하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상념에 도취한다. 이런 도취가 없다면 어떻게 밋밋하기 짝이 없는 생을 지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봄만 같아라'고 소원하는 연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2006 안병기

▲ 연못에 떨어진 벚꽃잎들과 왕버드나무 그림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빚어내고 있다.
ⓒ2006 안병기

왕버드나무에게 배우는 배려 혹은 상응

연못 가운데에는 삼신산이 있고 산의 한가운데에는 왕버드나무가 홀로 서 있다. 언제 보아도 과묵하면서 초연한 모습이다. 꽃잎이 날리건 낮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건 거들떠보지 않는다.

봄이야 철따라 오가는 것. 왕버드나무는 지금 시절을 낚는 중이다. 이제 곧 여름이 오고 녹음방초가 우거지면 그의 시절이 득세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아름다운 벚꽃을 구경하려는 상춘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건 말건 왕버드나무의 망중한은 흐트러짐이 없다.

남간정사는 주변의 많은 허공을 끌어안고 있고, 허공은 두 팔을 활짝 벌려 흩날리는 꽃잎들을 하나도 홀대하는 일 없이 제 품안에다 오롯이 받아준다. 이따금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연못 안으로 몇 잎의 벚꽃 잎을 던져준다. 왕버드나무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다.

사람이건 나무건 나이를 괜히 먹는 줄 아는가. 나이 들면 사물의 끝을 알게 되고 끝을 알면 궁극이란 말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거기에다 덤으로 상응 혹은 배려라는 말을 터득한다.

왕버드나무는 제 옷 다 벗어
제 그늘 아래 홑 것들 죄 덮어주고
지난 봄 눈 맞추던 어린 버들치 안쓰러워
물 속에도 몇 잎 뿌려주고

_복효근 시 '상응(相應)" 전문

곧 여름이 올 것이다. 햇볕이 뜨거운 한 여름날이면 왕버드나무는 융숭한 그늘을 만들어서 제 발 아래 사는 어린 잉어 등을 덮어 주리라. 이곳에 다니러 온 사람들 중 몇몇이나 버드나무의 그런 상응을, 그 따뜻한 배려를 눈치 챌 수 있을까.

우리에겐 헛된 자부심이 널널하다(널찍하다의 방언). 만물의 영장들이 제 허물과 부끄러움을 깨닫는 날은 언제쯤일까. 허공은 내 물음에 애써 답하지 않는다. 다만 제 두 팔을 활짝 벌려서 제게로 날리는 꽃잎들을 말없이 받아줄 뿐이다.


덧붙이는 글
☞가는 길
경부고속국도 대전 IC → 동서로 → 대전보건대학 방향 좌회전 → 대전보건대학 입구 지나 200m → 남간정사

*4월 15일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다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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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4-20 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