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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쓰인 소품 칼을 들자 벌판엔 전투 함성 들리는 듯
처음엔 자연만 봤다. 드넓은 목초지와 끝없는 양떼, 혹은 눈동자를 물들이는 바다와 세포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 그러나 영화 ‘나니아 연대기’ 촬영지를 찾아 몇 해 만에 다시 간 뉴질랜드에선 사람이 보였다. ‘키위’(뉴질랜드인의 별칭)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확신이 강했고, 격식을 차리지 않았지만 예의를 잃진 않았다. 판타지 영화의 무대에서 살아가는 ‘나니아 사람들’은 따스했다.
1.카라
주근깨 투성이 그녀가 멋쩍은 듯 씩 웃었다. 이어 청바지에 사과를 문질러 닦은 뒤 크게 베어 물었다. 영락없는 시골 처녀 모습이었다. 2000 마리 양을 기르는 목장 ‘테 탕아’ 쪽문 옆에서 자라던 사과나무에서 열매 다섯 개를 따낸 카라는 성한 놈 두 개를 골라 하나는 건네주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손에 남은 사과들을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말(馬)이 워낙 좋아해요.”
작은 마을 오와카에 있는 그녀의 가족 목장에 간 것은 양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어서였다. 광활한 산비탈 목장 안을 트럭으로 다니다가 양떼를 보면 내려서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매번 양들은 전력질주로 멀어졌다. 따라 뛰다 두 번이나 진창에 빠졌다. 언덕 아래 카라가 놀리듯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쑥스러웠지만 양을 따라 풀밭을 뛰어다니는 일은 즐거웠다. 가족 관객을 겨냥한 ‘나니아 연대기’에 동물 캐릭터가 대거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듯, 동물과 함께하는 여행담은 모두를 사로잡을 모험담일 테니까.
손님을 말에 태우고 다니는 가이드 일을 주로 하는 카라와 ‘푸라카우누이 베이’에 갔다. 남섬 동남쪽 도시 더네이딘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절경의 해안을 달려 도착한 그곳은 결말 부분을 찍은 곳이다. 네 남매가 왕관을 쓰는 궁전 외부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낸 것이지만, 깎아지른 절벽과 짙푸른 해변은 작품 속 그대로였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사자왕 아슬란이 홀로 걸어 사라져간 그 바닷가가 남쪽 끝 근처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뉴질랜드 남단이라면 세계의 맨 아래 부분이기도 했다. 저 멀리 파도를 타는 서퍼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보드 끝에 제겨 디뎌 체험하는 세상의 끝은 어떤 느낌일까. 한없이 고요한 세계의 밑바닥은.
아름다운 해변과 풍요로운 농장. 헤어질 무렵 “행운을 타고나셨군요”라고 웃음을 머금고 말을
건넸더니 카라가 정색하고 답했다. 예전엔 몰랐다고. 그저 답답해 몇 년간 외국으로 떠돌았다고. 밖에 나가서야 스스로 얼마나 행운아인지
깨달았다고. 돌아온 그녀는 이 땅을 너무 사랑한다고. 행복은 맛이 강하지 않은 최상급 포도주 같은 것이다. 얕은 입맛에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2.로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 때 영국으로 갔다. 사이클 선수로 나름대로 성공했다. 카라가 떠올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돌아왔죠?” 미소와 함께 로브가 받았다. “영국에선 여름이 두 주 밖에 없거든요.”
남섬 캔터베리 지역엔 이미 ‘나니아 연대기’ 여행상품이 나와 있었다. ‘반지의 제왕’과 ‘킹콩’에서 ‘나니아 연대기’까지, 외지인에게 뉴질랜드는 온통 판타지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안내하는 로브 같은 키위들에게 판타지는 하루하루의 리얼리티였다. 여행객과 원주민,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너.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가르는 것은 각도일 뿐 둘 사이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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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정점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아서즈 패스 국립공원 인근
‘플록 힐’이었다. 네 남매가 이끄는 아슬란 병사들과 하얀 마녀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클라이맥스를 찍은 곳이었다. 험준한 사유 목장에 제작진이
직접 만든 비포장도로 6㎞ 끝에서 바위가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협곡을 만났다. 바위 아래 그늘에 앉아 점심 샌드위치를 먹을 때 산토끼가 코
앞을 가로질렀다.
계곡 옆으로 걷자 탁 트인 대평원이 나타났다. 칼을 든 맏이 피터가 돌격 명령을 내리던 바위로 갈 때 로브는 실제 쓰인 소품을 가져왔다. 칼을 들고 바위에 서자 벌판을 메운 양 진영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장면이 펼쳐졌다. 누른 벌판을 휘감고 솟아오른 바람이 칼 끝에서 웅웅거렸다. 환상이 깃들 곳은 태고의 세계였고 시원(始原)의 공간이었다.
차를 되돌려 상상에서 현실로 복귀할 때 다시 물었더니 이번엔 진지하게 대답했다. “모든 일엔 끝낼 때가 있잖아요. 격심한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하자 자연스레 고향이 떠올랐어요.”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 삶 전체를 응축하는 상징일 것이다. 그게 공간이든 시간이든, 혹은 사람이든.
3.루크
그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이었으니까.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살던 그는 뉴질랜드 풍광에 반해 1992년 이주했다. “그러니까 당신을 키위라고 할 순 없겠네요.” 강바닥을 찔러 노를 젓던 그가 말했다. “아뇨. 14년을 살았는데 어떻게 키위가 아닐 수 있겠어요.”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가 또 있을까. 크라이스트처치는 더없이 고즈넉했다. 벤치 사람들은 책을 읽었고, 풀섶 사람들은 누운 채 눈을 감았으며, 보트 타는 사람들은 흐름에 배를 맡겼다. 에이번강에서 펀팅(영국식 뱃놀이)을 할 때, 도심을 가로지르는데도 급해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시간을 초대해놓고 있었다. 문명의 아찔한 속도 속에서 필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최선이라는 말에 쫓기지 않을 권리, 주저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있는 권리.
물론 크라이스트처치도 ‘천국’은 아니었다. 그날 지역 신문 머리기사는 토요일 밤마다 외곽을 공포로 몰아넣는 폭주족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잠시 머문 이국의 도시에서 늘 서두르던 객(客)은 모처럼 평안을 얻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했다. 어차피 여행은 학습이나 각성이 아니라 휴식이나 추억을 위한 것일 테니.
작고 맑은 에이번강에 바람이 불자 낙엽이 떨어져 강물을 덮었다. 주변 숲을 새삼 둘러봤더니, 세상에, 남반구의 이 예쁜 도시는 뿌리부터 잎까지 온통 가을이었다. 잠시 뱃전에 앉은 루크가 물었다. “한국은 지금 날씨가 어떤가요.”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시간 속을 흘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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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는 작년 말 개봉한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미국에서만 2억9000만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 후속편 계획을 발표한 이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이 완결된 상황에서 ‘해리 포터’와 함께 판타지 바람을 이어갈 대작으로 평가된다. 영국 작가 C.S.루이스 원작을 앤드루 애덤슨 감독이 영화화한 이 작품은 최근 국내에서 DVD로 출시됐다. 2차세계대전 중 시골 마을로 피신한 네 남매가 옷장을 통해 들어간 신비한 나라 나니아에서 겪는 모험을 그렸다.
◆여행수첩=‘나니아 연대기’는 뉴질랜드 곳곳에서 찍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해 사자왕 아슬란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숲 장면을 찍은 홈부시 목장과 마지막 전투를 촬영한 플록 힐 등을 순례하는 여행상품(www.lionwitchwardrobetours.co.nz)이 있다. 아슬란 근거지 캠프 장면 무대인 엘리펀트 락은 오아마루 시 인근에 있다. ‘Vanished World Visitor Centre’(전화 64-3-471-7372)를 통하면 쉽게 갈 수 있다.
남섬 동남쪽 끝 캐틀린스 지역에는 대관식 장면의 푸라카우누이 베이가 있다. 이들 촬영지 부근 도시 중 크라이스트처치는 ‘영국보다 더 영국적인’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빼놓을 수 없는 항구 도시 더네이든 인근에는 뉴질랜드 유일의 성(城) 라나크 캐슬도 있다. 한국어를 지원하는 www.newzealand.com에서 뉴질랜드 전체 관광 안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뉴질랜드=이동진기자 [ dj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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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2006-04-26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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