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가족은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쌓을 수 있을 만큼 쌓아두고 흐뭇해하면서 제 욕심을 채울 수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부러워하고 또 한편으로 탐을 낸 것입니다.
그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아버지라 불리는 남자가 그야말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저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집과 가축, 그리고 노예까지 ‘가족’이라 불렀다 합니다.
가족의 중심이 남자이던 시절, 가족은 ‘그’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이었고 그런 이유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앞에서 예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가 주인이었으니까요. 그것은 존경이라기보다 복종에 가까웠지만 뭐 도리가 없던 것입니다.
“아, 예. 그러세요?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알았어요.”
이를테면 그런 식이었습니다.
가끔 한 시간이 영원 같고, 한 달이 우주의 시간인 듯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반면 가족의 역사는 인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어림잡아도 6만 년은 될 듯하니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한데 기이하게도 그것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긴 시간 동안 경제력을 쥔 구성원에게 권력의 지팡이를 건넨 가족이라는 이름의 기이한 울타리 말입니다.
3대가 함께 사는 가족을 떠올려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 집안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 의해 움직일 것이 뻔합니다.
신문과 채널의 주도권은 아버지에게, 식단과 교육의 주도권은 어머니에게 쥐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 종종 제가 가축이거나 노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지루하고 답답해, 빨리 자라서 뛰쳐나가고 말 테다, 하는 식의 호기로 매번 제 방문을 쾅쾅 닫아대곤 했으니까요.
해마다 5월이 되면 난데없이 가족의 사랑이 넘쳐납니다. 오죽 가족에 대한 애증이 깊으면 가정의 달이라는 것을 만들었겠나 싶은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만 그 이야기는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됐든 대체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들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의 모습, 빤한 살림에 효도하고 아이들을 챙기는 어머니의 모습, 병든 부모를 눈물과 함께 끝까지 책임지는 아들과 딸들의 이야기. 이거야 원. 완전히 동화 아닙니까?
어찌됐든 그런 이야기를 접하고 아, 나도 저런 부모가 되어야겠구나, 그래 이제 나는 저런 자식이 되어야겠어, 라고 마음을 다잡은 누군가가 생긴다면 꽤 다행이겠습니다만 솔직히 그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이라면 해봐야 뭐 하겠습니까? 저희 집의 경우는 보통 이랬습니다.
“야, 쟤 봐라. 저렇게 어려워도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저런 애들도 있다. 배워라 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공부 못하는 아들에게 잔소리도 안 하고 이것저것 잘도 사주는 부모인들 왜 없겠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어린 제게는 또 그렇게 말할 만한 용기가 없던지라 뭐 별수 있나요? 역시 심술맞게도 제 방문이나 쾅쾅 닫는 수밖예요.
‘빨리 자라서 뛰쳐나가 버리고 말 테다.’ 그렇게 말입니다.
그래선지 몰라도 가정의 달이고 뭐고 그냥 조용히 지나갔으면 싶습니다. 제 경우라면 그런 눈물 어린 사연이거나 캠페인 탓에 전에 없던 불화가 생기는 꼴이었으니까요. 저는 단호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것은 6만 년의 역사가 증명해줄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가족은 재산이라니까요.
가족은 이를테면 영혼이 깃든 집과 같다
괜히 5월이 됐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자제할 수는 없겠습니까? 저는 이런 장면을 기억합니다. 지붕 위로 비둘기가 날아가면 마당에 풀어놓은 흰 강아지가 제 털을 흔들면서 시작되는 장면이지요.
아버지는 채소즙을 마시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지요. 할머니는 온화하게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옛이야기를 건넵니다.
그것은 어릴 적 제가 배운 말도 안 되게 행복한 가족의 전형적이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이를 먹어도 행복한 가족, 하면 어쩐지 그 모습이 절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적어도 전 아닌데 당신의 가족은 그렇습니까?
사람의 생김새만큼 가족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왜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들 못하는지,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습니다만 저는 어린 시절 그것이 너무도 불만이었습니다.
춤바람 나서 쫓겨난 어머니와 살고 있던 제 친구는 그럼 5월에 뭘 해야 합니까? 술만 마시면 아들놈만 죽어라 연탄집게로 때려대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던 제 또 다른 친구 하나는 또 어떻게 합니까?
치매 걸린 할머니가 밤마다 방바닥에 똥을 싼다면 견딜 수 있습니까? 고아는 어떻게 합니까?
가족은 내게 처음으로 사랑을 건넨 상대라고들 하지만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가장 처음 상처를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아무래도 그것이 가족인 것입니다.
태생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상대라면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꽤 오랫동안 가족을 다루는 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뛰쳐나가고만 싶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가족은 이를테면 집과 같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집은 분명 재산입니다. 하지만 조금 특별한 재산입니다. 구성원에 따라 변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호사스러운 호텔에 묵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발을 쭉 펴면 절로 그래도 내 집이 최고다, 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집에는 정말이지 영혼이 깃드는 모양이지요. 집을 재산으로만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개발의 여지가 없어도, 평수가 작아도, 덜렁 방이 한 칸뿐이라도 마음 편히 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진짜 가족이 되려면 서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이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아이들의 가족 소개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자기 소개에 버금가게 쑥스럽고 딱히 할 말 없어 참 하기 싫은 것 중 하나였던 관계로 제법 진지하게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한데 딱히 달라진 것이 없지 뭡니까. 뭔가 새로운 모습을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이었습니다. 하긴 이제는 제 또래들이 부모가 됐을 텐데 뭐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아빠는 ○○회사 다닙니다. 과장님입니다. 엄마도 ○○회사 다닙니다. 저는 여덟 살입니다.” 그리고는 끝.
“아빠는 ○○가게를 하십니다. 술을 조금 많이 마십니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잔소리도 많이 하지만 그래도 저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 가족은 굉장히 행복한 가족입니다.” 그리고는 끝.
그래도 저는 그것이 굉장히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꽤나 비참하고 처참한 결과이긴 합니다만 가족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많이 영악해졌다지만 그런 것을 두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내심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빠는 발이 커서 운동을 좋아합니다. 운전할 때 욕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드래곤즈 축구단입니다.
엄마는 글씨를 예쁘게 쓰고 머리칼에서 좋은 냄새가 납니다. 게으른 사람을 제일로 싫어합니다. 제 동생은 여섯 살인데 요기하고 요기에 점이 있고 마늘을 못 먹고 케로로를 좋아합니다.”
아, 짧았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가족 소개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명쾌하게 가족 소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가족을 다루는 방법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제 자리에 가만히 두고 바라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것이 욕심인 줄 모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끌어안으려 하면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저처럼 뛰쳐나갈 생각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놈의 집구석 도대체가 견딜 수가 없어,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내 뜻대로 가르치고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은 가족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진짜 가족이 되려면 그들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할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떤지, 이런 것을 할까 하는데 네가 하면 어떻겠는지.
집을 재산으로 보면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더 넓고 더 크고 더 빛나는 집은 계속 만들어질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가족 구성원이 만들어나가는 집이라면 이를테면 핸드 메이드니까 세상에서 하나뿐인 대단히 소중한 집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두둑한 용돈을 드리면, 좋은 옷을 건네면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옷이 마음에 든 것일지 모릅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당신의 말에 복종하면 아이가 예뻐 보입니까?
혹시 당신의 욕심이 채워진 것은 아닌지요. 아이에게 장난감을 건네면 좋아합니까? 당신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장난감이 마음에 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가족의 뜻으로 만든 집에 깃든 영혼은 언제고 편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편히 발 뻗고 자신도 모르게 내 집이 최고다, 내 가족이 최고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내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빨리 자라서 뛰쳐나가고 말 테다.’
행여 아이가 자라 제게 그런 말을 건넬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아니 왜 안 오겠습니까? 단단히 준비해서 그때는 이렇게 말해볼 요량입니다.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부디 아버지가 만들지 못한 집을, 아버지의 집보다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가족이 할 일일 테니까요.
profile 작가 김종은
1974년 서울생/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소설 ‘서울 특별시’로 2003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
소설집「신선한 생선 사나이」
[편집후기] 이해의 선물
살면서 종종 암묵처럼 양해된 사회적 금기 몇 가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족 가치에 대한 모독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금기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형제간의 끈끈한 우애, 가족 구성원 사이의 절대적인 신뢰 혹은 끝없는 이해와 용서… 그런 것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내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로 경계당하기 십상이다.
가정이란 단위는 엄연히 경제 공동체의 형태를 띠지만 일상에서 가족을 말할 때 정서적 유대 관계 그 이상을 언급할라치면 분위기는 곧 어색해진다. 말하자면 ‘눈 가리고 아웅’식의 가족 이데올로기다.
사랑 못지않게 상처주기도 쉬운 관계가 바로 가족이라는 건 누구나 공감할 얘기가 아닐까. ‘조건 없는’ ‘절대적인’이라는 말로 묶인 집단이 합리적으로 운영되기란 쉽지 않다.
밖에서라면 충분히 양보하고 협조할 일이라도 가족 안에서는 어쩐지 더 억지를 부리게 되고, 자기 감정을 무리하게 표출하게 된다.
때론 강요에 가까운 요구를 별 가책 없이 하게도 된다. 그러고 보면 가족만큼 뻔뻔하고 천연덕스러운 관계가 또 있을까 싶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괴롭힌다면 가족 간의 사랑은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에 그치기 쉽다.
그것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억압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정, 다른 가족에 대한 억압이 될 때 문제는 더 커진다.
노처녀, 노총각에 대한 압박, 이혼 가정에 대한 편견, 무능한 가장에 대한 비웃음 같은 건 결국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집의 결과다.
마론 인형처럼 완벽한 규격과 비율을 갖춘 미인이 실제 존재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상적인 가족은 그저 이상일 뿐이라고 보면 된다.
마론 인형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밉고 못생겼다고 할 수 없듯 이데올로기에 갇힌 가족관은 건강한 가치관이라 말하기 어렵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 가족에게 어떤 물건을 선물할까 고민하기 앞서 생각해봄 직하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서로에 대한 존중을 먼저 선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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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레이디경향 2006-05-16 02:03]![](http://www.xn--910bm01bhpl.com/gnu/pinayarn/pinayarn-pinayar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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