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오마이뉴스 2006-06-0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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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의 과거와 현재. 왼쪽(左)이 현재의 길, 오른쪽(右)이 옛 길입니다. ⓒ2006 이희동 |
ⓒ2006 이희동 |
그래서 찾은 곳이 문경새재. 우리 식구는 울진을 나와 예의 불영계곡을 지나 어머니 고향인 영주를 거쳐 문경새재로 향했다. 비록 산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두 개의 험준한 산 사이에서 그 산의 경치와 풍류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문경새재라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금상첨화로 문경새재에서는 예전 선인들의 풍부한 흔적들도 같이 볼 수 있지 않은가.
문경새재.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서 “새(新)재”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어원이 어디서 유래되었던 간에 특이할 사항은 아직까지 그 명칭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까지 순 우리말로 구전된다는 것이다. 추풍령이나 죽령 등 백두대간을 넘는 다른 고개들과는 달리 그 명칭이 순우리말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아마도 문경새재가 그만큼 우리네 삶 속에 깊이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추풍령이 가장 큰 고개로 꼽히고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백두대간을 넘는 최고의 고개는 그 통행량이 가장 많았던 문경새재였다. <영조실록>에서도 영의정 김재로는 영남대로의 같은 역참을 경유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일본에서 돌아오는 신사 행렬을 중로(문경새재)와 좌로(죽령), 우로(추풍령)로 나누어 정사는 중로로, 부사는 좌로로, 종사관은 우로로 향하라고 건의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문경새재가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큰 것이다.
오랜만에 도착한 문경새재. 내게 문경새재는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다. 초·중·고등학교 때는 보이스카우트다, 수련회다, 수학여행이다 하면서 자주 찾았으며, 졸업을 하고 나서는 친구들과 혹은 식구들과 가끔 들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재로 들어가는 길목은 역시나 새로웠다. 비록 그 입구께는 번창하는 음식점과 노점상으로 예전보다 시끄러워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철마다 다른 신록의 색깔은 올 때마다 다른 문경새재를 내게 선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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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관문 주흘문 ⓒ2006 이희동 |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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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가의 쉼터. 선인들이 그랬듯이 한번쯤 쉬어갑니다. ⓒ2006 이희동 |
ⓒ2006 이희동 |
KBS 사극 <왕건> 등에서 쓰였던 바로 그것들이었다. 관리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 드라마 소품들을 이곳에다 고이 방치해 놓았을까. 아마도 ‘관광문경’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드라마 세트장과 함께 볼거리를 늘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관람객들에게 과거 무기를 전시함으로써 문경새재가 가졌던 군사적 의미를 연상시킨다는 전략. 아마도 그와 같은 생각에는 문경새재가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문경새재는 한반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멀리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문경새재를 무사히 지나가면서 이곳을 지키지 않은 신립 장군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문경새재는 오래전부터 군사적 요충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문경새재에는 군사적 요충지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양반들의 이미지다.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은 죽을 쑬까 봐 죽령을 피했고, 추풍낙엽 떨어질까 봐 추풍령을 피했고, 오직 경사를 듣기 위해(聞慶) 이곳 새재를 지나갔다고 한다. 따라서 새재 곳곳에는 그 시절 수험생들에 관한 신화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지나다니던 옛 길은 소위 장원급제길이라 불리며, 그 길 중간에는 심지어 책 바위라 불리는 그들이 소원을 빌던 돌무덤도 존재한다.
과거의 문경새재를 군사적 요충지로, 혹은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의 길 등으로 어떻게 인식하냐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편견 때문에 과거 문경새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많은 의미를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본적으로 문경새재는 길이었다. 비록 지금은 길이 아닌 길, 하나의 유적만으로 존재하기에 과거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으로 갈라진 이질적인 두 지역문화가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간의 정보를 주고받는 주요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경새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삶을 꾸렸을 터전이었을 것이며, 훨씬 더 많은 애환과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재’라고 했을까. 그건 단순히 새재가 험하고 높기 때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문경새재의 의미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과거 지배층만이 아닌 민초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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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구정 터. 경상감사가 교체될 때 서로 만나 업무와 직인을 인수인계 하던 곳이랍니다.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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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관문 가는 길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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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의 계곡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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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관문 조곡관 ⓒ2006 이희동 |
ⓒ2006 이희동 |
이때부터 시작되는 고민. 과연 제3관문 조령관을 오를 것이냐, 말 것이냐. 이전에 문경새재를 자주 왔었음에도 초등학교 수련회 때를 제외하고서는 항상 이곳 조곡관까지 와서 발걸음을 돌려야했던 나는 조령관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또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 식구들은 끝까지 가기로 결정했고 조곡약수로 목을 축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높이가 꽤 차이 나는지 저 밑과는 달리 제3관문 가는 길은 아직 이른 봄이었다. 개나리가 피고 있었으며 아직 채 싹이 나지 않은 나무들이 즐비했다. 덕분에 앙상한 나뭇가지로 보이는 주흘산의 바위들이 나의 마음을 더 설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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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관문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책 바위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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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관문 조령관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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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늦었던 탓에 걸음을 빨리하여 왔던 길을 내려왔다. 동생 녀석은 쉬러 왔다가 여기서 알 배고 간다며 투덜투덜 댔지만 그래도 길가로 펼쳐졌던 풍경들이 워낙에 좋았는지 1절만 하다 만다. 우리는 그렇게 길도 아닌, 산도 아닌 문경새재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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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어지는 그림자 ⓒ2006 이희동 |
ⓒ2006 이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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