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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아이들 손 떠나는 '조립식' 장난감

피나얀 2006. 6. 11. 21:03

출처-[오마이뉴스 2006-06-11 16:07]

 

▲ 추억의 조립식 장난감 ⓒ2006 임형섭
ⓒ2006 임형섭

"우리 때에는 저 300원짜리 하나 갖고 싶어서 매일 세뱃돈 받을 날만 기다리곤 했는데…."

2006년 6월, 인사동의 한 오래된 물건 가게에서 만난 김기형씨(41, 서울 은평구)가 읊조린다. 가게 안에는 70년대와 80년대 물건들이 멋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김기형씨의 눈길을 계속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조립형 놀이 완구, 통칭 '조립식'이다.

'보물섬', '해적선' 시리즈부터 '별나라 손오공' '태권 로봇'에 이르기까지 김씨에게는 모두 탐스러운 물건들이다. "옛날엔 가지고 놀만한 게 뭐가 있었겠어요. 그냥 싸게 살 수 있는 구슬이나 종이 딱지 같은 것들 가지고 노는 거지. 그러다가 몇몇 놈들이 저 조립식을 모으기 시작하더라고, 어찌나 부러운지. 나도 어쩌다가 용돈 좀 모이면 하나 사서 날마다 가지고 놀았죠."

대통령이 되어 조립식을 맘껏 사보는 것이 꿈이었다는 김씨에 비하면 지금의 20대들은 나름대로 '풍요로운 조립식 생활'을 만끽했다. 그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에는 소년만화 열풍과 맞물려 조립식 시장 역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대부분이 조립식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남자아이들은 틈이 날 때마다 문방구에서 조립식을 사다가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메칸더' '우뢰매' 등의 로봇 제품들과 함께 'G.I.유격대' '세계 대전'과 같은 군인풍 장난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빨간색 사각형 바탕에 하얀 ACADEMY 글자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릴 적에는 아카데미과학사 제품을 누가 더 완벽하고 멋있게 조립하느냐를 두고 친구들끼리 자주 경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 중 하나가 '아카데미과학사'라고 이야기하는 대학생 고동욱씨(24). 그 외에도 신성과학의 '보물섬' 시리즈나, 제일과학의 '과학상자' 등이 기억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24살 대학생의 어린 시절 판타지를 지배했던 조립식 장난감도 90년대 중반을 지나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차츰 아이들의 손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학교 끝나면 학원 가야죠. 노는 시간에는 주로 컴퓨터오락을 많이 해요." 학교 방과 후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고 노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시현 어린이(10, 서울 강동구)의 대답이다. 조립식 장난감에 대해서 한 마디. "가끔 만들기는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래서 잘 안 해요."

 

취학 전 아동의 경우에도 가장 친숙한 장난감은 컴퓨터이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김수연 어린이(7, 서울 강동구) 역시 평소에 컴퓨터 오락을 즐겨 한다며 가장 받고 싶은 선물로 '게임기'을 꼽으며 '조립식 로봇'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보였다.

요즘 아이들은 디지털 놀이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놀이 중 하나인 인터넷게임은 점점 그 비중이 높아져만 가고 있다. 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 공동 조사한 2005년 하반기 정보화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만 3~5세 유아의 평균 인터넷게임 이용률이 47.9%, 만 5세 유아는 64.3%에 이른다고 한다.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거의 80%에 달하는 아이들이 인터넷게임을 즐기고 있다.

인터넷 게임에 밀려나는 '아날로그' 장난감

디지털화된 놀이문화의 강세는 오프라인의 장난감시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경기도 평촌에 위치한 장난감 전문 매장 '토이뉴스'(Toy News). 매장 진열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소위 '똑똑한 장난감'이라고 불리는 디지털 장난감들이다.

주부 정명신씨(37, 경기도 안양시)는 장난감을 사기 위해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매장에 들어선 아이는 무선 조종 헬기를 구경하러 가 버리고 장난감을 고르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 된다.

 

정씨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아이가 간절히 바라는 무선 조종 헬기와 어린이 영어 학습용 비디오테이프 몇 개를 고른다. "최근에 아이가 컴퓨터게임만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장난감을 자주 사 주는데, 저절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신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토이뉴스 점장 김현희씨(36)의 말에 따르면 장난감을 구입하는 것은 주로 어머니들이라고. 그래서인지 몬테소리와 같은 교육적 효과를 표방하는 장난감들은 꾸준한 매출을 기록한다고 한다. 교육용 장난감의 강세와 함께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디지털 장난감의 강세.

 

디지털 장난감은 각종 기능 때문인지 가격이 꽤 비싼데도 많이들 사가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반면에 값이 싸더라도 조립식 장난감은 별로 인기를 모으지 못하는 듯하다. 가끔 5000원~1만원 정도 하는 조립식 장난감을 가져다 진열해 놓기도 하지만 아이들이나 어머니들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장난감이 조립식과 같은 아날로그식 장난감을 밀어내고 아이들의 마음에 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권기남 서울대 병설 어린이집 부원장(서울대, 아동학 박사)은 단순히 디지털 장난감이 더 큰 재미를 주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권 부원장에 따르면 디지털 장난감은 특유의 빠르고 다양한 자극이 강점.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아이에게 애착을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아이의 행동에 대하여 신속하고 다양한 자극을 통해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장난감의 경우 끊임없이 자극을 제공하고, 또한 아이의 행동에 신속하게 반응한다."

권 부원장은 그와 더불어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현상 또한 디지털 장난감의 강세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들이 놀기 위해서는 놀 공간, 놀이대상(사람), 놀이매개체(장난감)가 필요하다. 이를 놀이의 3요소라고 한다. 예전에는 많은 형제자매가 놀이대상이 되어 다양한 자극과 반응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자녀수가 많아야 한두 명인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놀이대상(사람)이 부족해진다. 때문에 놀이매개체(장난감)에게 놀이대상(사람)의 역할을 일부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변덕스럽지 않게 반응까지 해 주는 디지털 장난감은 금상첨화라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는 특별한 것을 해주고 싶다'. 분유 광고카피로 쓰일 법한 이 말은 요즘 엄마들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부모들의 욕심, 거기에 장난감 회사의 고급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물이 디지털 장난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장난감가게를 찾은 김희연 주부(39)는 "옆집 애가 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 우리 애한테도 사줘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왠지 지능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구요"라고 이야기 하며 '토킹 드라이버' - 운전 놀이를 하면서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익힐 수 있다고 한다 - 를 집어 든다. 5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임에도 전혀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예전 부모들은 아이들의 장난감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이들이 근처 문방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값싼 조립식 등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부모들은 '내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 주머니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놀 거리를 마련해 준다.

 

이를 이용해 장난감업체에서는 각종 첨단기능을 장착한 고가의 디지털 장난감을 만들어 아이들과 부모들을 유혹하고 있고, 이에 부모는 쉽게 지갑을 열게 되는 것이다. 장난감을 구입하는 당사자가 아이들에서 일정 부분 부모들로 넘어오면서 '싸구려'인 저가 조립식 장난감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권 부원장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디지털 장난감이 조립식과 같은 아날로그식 장난감을 대체하는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겠지만, 아날로그식 장난감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경험하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이 안쓰러운 것이 사실"이라며, "예전 조립식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이리저리 조립해 보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문제해결능력을 키우기도 하고, 은근과 끈기, 노력의 소중함을 배우기도 했다. 이는 규격화된 형태의 디지털 장난감이 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여겨진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조립식' 장난감의 주 고객층은 20대 마니아

▲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 만든 프라모델 작품. ⓒ2006 임형섭
ⓒ2006 임형섭

시대가 변하고, 아이들이 변하면서 점점 뒤쳐지게 된 조립식 제품들은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기도 한다. 전문화 전략을 내세운 아카데미과학사는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아카데미과학사 제품들이 '프라모델'이라는 이름으로 마니아층에서부터 일반인에게까지 소비층을 넓혀가고 있다. '프라모델'이란 '플라스틱'과 '모델'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일본식 조어이다.

삼성 코엑스몰에 위치한 아카데미과학사 직매장 점장 정동욱씨에 따르면 아카데미과학사 제품의 주 소비층은 이제 20대이며, 30대 초반 분들 중에도 자주 찾는 단골 고객들이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조립식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사람들이 그 매력을 잊지 못하고 하나의 전문적인 취미로 발전시킨 것이다. 전문화된 만큼 가격도 꽤 비싼 편이다. "제품 하나 사실 때 기본이 5만원 정도, 색칠이나 다른 요소에 얼마나 신경 쓰느냐에 따라 몇십 만원까지 가는 일도 있죠."

프라모델 마니아들은 동호회 등을 만들고 정기적인 모임도 가지면서 조립식 장난감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곤 한다. 인터넷 프라모델 동호회에서 활동 중인 김현수씨(20)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새로운 세상을 스스로의 손으로 창조해 냈을 때 느껴지는 쾌감이 프라모델의 매력"이라며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끈기와 거기서 나오는 쾌감을 느껴볼 기회가 좀처럼 없는 것 같다"라고 아이들 놀이문화의 최근 변화에 대해 약간의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조립식을 직접 아이들의 손에 쥐어주던 동네 문방구 아저씨들도 최근 변화가 달갑지 않다. 소매상에서 주로 판매해 왔던 저가의 조립식 제품이 이제 많이 생산되지 않을 뿐더러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 위에도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서울 강동구에서 문방구를 20년째 운영하고 있는 이용학씨(53)는 "근 몇 년간 장난감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장난감은 이제 인터넷이나 대형마트를 이용할 뿐 문방구에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라며 한숨을 내쉰다.

 

이씨의 말 대로 값싼 놀이 기구를 찾아 문방구 안을 꽉 채우던 아이들의 모습을 이제 잘 볼 수 없다. 예전 문방구는 아이들의 놀 거리, 공부 거리 등을 뭉뚱그려 해결하는 '아이들의 만물상'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는 단순히 '학용품 매장'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립식 로봇들을 가지고 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 최근 김기형씨처럼 오래된 물건 가게에서 옛 조립식 장난감을 보면서 향수에 젖는 기성세대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옛 조립식 장난감을 보면 어린 시절 자신들이 꿈꾸었던 판타지가 다시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조립식 장난감이 차지했던 위치는 이제 컴퓨터 게임과 디지털 장난감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마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가치판단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단지 지금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유년기를 떠올렸을 때, 그들에게도 그럴듯한 판타지가 펼쳐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 기성세대들의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마치 조립식 장난감을 볼 때 자신들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