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YARN™♡ 【음악·영화】

‘마지막 무대’ 앞둔 록의 대부 신중현

피나얀 2006. 6. 26. 19:03

출처-[한겨레 2006-06-26 16:45]

 

 


■ 대담=박준흠 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

‘한국 록의 대부’, ‘대중음악의 산 역사’. 가수 신중현(68)이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긴 발자취는 깊고, 넓다. 록과 솔 등 서구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들이 그의 손을 거쳐서 이 땅에 들어왔고, 거기에 한국적 색을 입힌 이도 그였다. 김추자, 펄 시스터즈, 장현 등이 그를 통해 데뷔했다. 그가 만든 <미인> <꽃잎> <아름다운 강산> 등은 인구에 회자되며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확장하고, 깊이를 더했다.

 

그런 그가 이제 무대를 떠난다. 7월1일 인천문학경기장 보조구장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 공연을 마친 후, 무대 위의 경력을 마감한다. 박준흠 광명음악밸리축제 음악감독이 은퇴 공연을 준비 중인 신중현씨를 만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음악 얘기를 나누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속에서 용인의 목조 자택에서 손님을 맞은 신씨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이번이 마지막 공연…앞으론 인터넷 방송 하겠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때 음악인은 가장 위대하고 빛납니다. 그런 공연에 이제 ‘마지막’ 자를 붙이신다고 합니다. 느낌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계속 또 하겠다는 게 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집안에 어른이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안 좋은 겁니다. 떠날 때 훌쩍 일어나서 나가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도 홀가분하죠.

 

-그래도 서글프지는 않으신지요

 

=(잠시 뜸들이다가) 서글픈 건…. 말도 못하죠. 사실, 음악밖에 모르고. 음악 세계는 내 것이라고 평생 살았는데. 떠나는 느낌은 말로 다 할 수 없죠.

 

-공연의 소회는 어떤신지요.

 

=지방공연을 많이 안 해서 팬들한테 찾아 뵙고 인사드리는 게 개인적인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는 음악은 라이브 체질에 맞습니다. 레코드로 듣는 거랑 라이브랑은 아무래도 다릅니다. 언젠가 한번 직접 보여드려야겠다는 마음 먹었습니다.

 

-공연과 음반 작업을 접은 대신, 다른 활동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인터넷 방송을 할 생각입니다. 은퇴 공연을 마치고 내년쯤부터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정도에 홈페이지(www.sjhmvd.com)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얘기도 하고, 음악에 대한 교육도 할 생각입니다. 용인의 집에 스튜디오 시설도 어느 정도 마련한 상태입니다.

 

-선생님의 음악을 들어보면 거의 다 짝사랑의 노래만 부르셨습니다. 공연 중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더라도, 선생님은 그 속에서 공허함, 외로움을 느끼시는 듯합니다.

 

=그렇죠.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외로움 속에서 인생을 걸어온 것 같습니다. 제 음악은 이루어진 사랑을 그린 게 아니라, 마음의 미련을 그렸습니다. 체구가 작아서 젊었을 때 혼자서 누군가를 좋아하다가 실망하거나 퇴짜를 맞거나 그런 경험을 겪었죠. 그러다보니 접근하기도 전에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가사가 대부분 그런 식입니다. 그래도 거짓말할 필요는 없는 거고. 솔직한 면에서 음악이 살아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둘째 윤철이 아깝다…안 알아주니 섭섭

 

-1997년 <김삿갓> 음반을 내신 이후에 선생님께서 “내가 아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한국적인 록음악을 창작하려고 했지만 현대적인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그 말씀을 듣고 선생님이 그 이후에도 창작 음반을 정기적으로 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이후에 나온 음반은 작년에 나온 <도시학>과 <안착>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음반을 내도 방송에서 틀어주는 것도 아니고, 홍보에서 막히다 보니까 엄두를 못냈습니다. 그래도 가끔 구실이 있으면 <하류인생> 같은 영화에서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그런 음악들이 저로서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대중에게 접근하는 기회가 없다보니 인정을 잘 못받았어요. (리메이크 음반을 가리키며) 이런 것을 자꾸 리메이크 하는 이유도 곡은 아까운데, 대중은 잘 몰라서죠. 시대가 많이 변하니까 젊은 세대는 저의 음악성을 잘 모르고, 옛날 분들은 좀 알지만 그분들은 이제 음악 들을 시기도 아니고, 그러니 별 다른 방법이 없는 거죠.

 

-2002년에 나온 <바디 앤 필> 음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음반에서는 두 번째 아드님인 신윤철씨가 전체적인 프로듀스까지 다 하고, 거기에서 보컬만 맡으셨는데요.

 

=저는 윤철이가 정말 아깝습니다. 그래서 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제작 등을 시켰지만, 그런 식으로 그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었습니다. 그런 음반들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보여드릴 기회도 없었고, 인정 받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음악인이 음악계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쉬움이 있습니다. <바디 앤 필>도 찾는 사람이 소수니까, 섭섭하죠.

 

-이번 은퇴공연에서 선생님은 다른 출연 가수들을 모두 전반부에 배치하고, 나머지 약 150분 동안을 쉼 없이 장악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 구성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라이브로 저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끌고 나갈 생각입니다. 공연에 연출적인 요소는 최대한 없애고, 음악으로만 죽이겠다는 생각입니다. 음악은 음악으로 즐기는 것이지 쇼를 해서 되겠습니까? 화려하게 쇼를 연출하고, 들락날락하면서 색칠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라이브로, 목소리부터, 주법, 기타소리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떠나고 싶은 생각입니다. 쇼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라는 인간 자체를 놓고서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공연 준비하면서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은퇴 무대도 인천 공연만 일정과 장소가 확정된 상태다.)

 

=일생 동안 어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요즘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집 수리도 하면서, 공연 준비하고, 음반 복각도 하니까 안타깝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부지런한 편이라서 잠자는 시간도 별로 안쓰고 일을 많이 합니다. 어려운 것은 여태까지 반복했으니까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뮤지션은 70년대에 끝났다

 

-선생님께서는 1970년 시민회관에서 ‘고고 갈라 파티’라는, 한국 최초의 사이키댈릭 무대를 꾸미셨는데요. 당시 객석을 매운 4000여명의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저는 최근에야 당시 실황 음반을 들었는데요, 그 때 어떻게 그런 공연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랍습니다. 선생님은 실제로 “75년도 활동 금지가 되기 전이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기였다. 세계적으로도 뒤지지 않았다”라고 말씀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음악 생활의 피크가 70년 전후였습니다. 그리고 75년 활동 금지가 될 무렵에 공교롭게도 세계적으로도 록 음악의 침체기가 시작됩니다. 댄스 뮤직이 판을 치는 시기가 온 거죠. 그래서 저만 슬럼프가 온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로커들이 뒤로 물러나는 때였습니다. 미국에서는 헤비 메털 등이 나오면서 발버둥을 쳤는데, 대중에게는 외면당했죠. 댄스 음악은 음악성을 상실한 것이고, 발 맞추는 음악 아닙니까. 그 때부터 음악은 상업적인 음악으로만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뮤지션은 그 시기에 끝났다고 봅니다.

 

-당시 시민회관 공연장에서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사이키댈릭 록 음악인 ‘이너 가다다 비다’를 불렀는데, 반응이 열광적이었죠. 어떻게 35년전에 그런 분위기가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시대를 정신적인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시대가 육체적인 시대로 바뀐 것이 75년대 이후인데 당시에 시대적인 정서는 정신적으로 아주 피크를 올렸던 시대입니다. 그 때는 음악을 수준급에서 감상했죠. 두려울 정도로 대중의 음악 수준이 높았습니다. 정신적인 시대이다 보니 음악이 감정과 깊이를 추구하고, 그런 쪽에서 감상을 하기 때문에 ‘이너 가다다 비다’ 같은 음악도 마음 놓고 했죠. 저희들이 물론 먼저 사이키델릭 록을 시도를 했지만, 그걸 금방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 때가 더 수준이 높고, 문화적으로 개방적이었다고 하면, 요즘 인터넷 세대는 동의 안할텐데요.

 

- 렇죠. 동의안하죠. 이해를 못하죠. 요즘은 멀티문화가 형성되어서, 대중이 혼돈을 일으켜서 그런지, 흔들고 뛰고 힘을 과시하는 부분, 육체적인 부분이 발달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엔 머리를 집중할 수 있는 포인트가 없는 것 같아요. 깊은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시기는 하나를 집중할 수 있는 시기이고. 정신적으로도 집중하고 포인트를 정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선생님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음반들을 짜깁기로,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선생님에 이르러서 최초로 작품으로서의 음반이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한국 최초의 앨범 아티스트’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선생님 음악의 정수를 느끼려면 그룹 ‘덩키즈’ 시절 음악부터 기타 솔로가 긴 ‘퀘션스’ 음반, 80년대 뮤직파워 1집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음악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평가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요즘에는 선생님을 ‘록의 대부’라고 막연하게만 치켜세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 “우리는 그에게 전설, 대부라는 타이틀만 줬을 뿐, 실험적, 도전적이었던 그의 음악에는 거리를 두는 것은 아닌가”라고 지적했더군요.

 

=저도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 뒤를 안돌아보고, 앞만 보고 가는 스타일이다 보니, 대중들을 너무 내버려두고 나만 달려온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렇게 해서 지금이 제가 존재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잘 했다고,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41년부터 해방 때까지 만주 신경에서 유년기를 보내셨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의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이 있었구요. 또 선생님의 친어머니께서는 일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일본적인 요소가 선생님의 음악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친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만주에서 보낸 시간은 여덟살 전 3, 4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영향이 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해방 이후에도 일본 음악의 영향은 컸습니다. ‘또로또’ 그러니까 뽕짝 음악을 많이 접했죠. 예를 들면 ‘사께와 노미다’ 같은 노래를 어릴 적 많이 들어서 잘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에도 엔에이치케이를 보면 엔카 음악을 하는데, 당시에 많이 들었던 노래들입니다.

 

<비 속의 연인> 외국곡? 일본곡? 토속곡!

 

-선생님에게 음악적인 영향을 준 요소들을 꼽는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6.25가 난 이후에 충청북도 진천에 내려가서 농사를 도우면서 토속적인 민요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때 밭 매면서 하는 노래들이 귀에 박혔죠. 당시 품바들이 와서 문밖에서 리듬을 때리는 것도 종종 봤습니다. 어려서는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 양반들이 하는 게 예술이었죠. ‘미인’같은 노래에서 한국적인 음악을 하는 것에도 그런 토속적인 영향들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후에 8군에서 일하면서 서양 음악을 접했는데, 거기에서는 미국 음악이 주류였습니다. 그 곳에서 스탠다드 재즈와 흑인 음악을 접하면서 그 매력을 느끼고, 식별하게 되었다. 또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라틴계 음악, 그러니까 탱고, 룸바, 차차차, 맘보가 유흥가를 중심으로 인기 있었습니다. 그런 음악들도 좋아해서 한번 들으면 잊지를 못했죠.

만주에 있을 때 중국 음악도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50년대에는 리시버를 끼고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들었는데, 당시에 중국 라디오 방송의 전파가 가장 셌습니다. 그래서 중국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많은 음악 중에서 6.25 때 들었던 노동요와 민요가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탄생된 음악이 가장 음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음악이 한국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토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64년 <비 속의 여인>도 어떻게 보면 외국곡 같고, 일본곡 같은데, 그 속에 토속적인 풍을 진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음악적인 절정기의 최고작, 최고의 노래는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최고는 없습니다. 제가 좀처럼 만족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물론 곡을 만들 당시에는 흐뭇할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 음악과 함께 살겠다는 것도 그래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좀더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지 않으면 좋은 음악이 안나온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 가수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현재에는 음악다운 음악을 하는 가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음악평론을 하는 저로서도 주류에서는 음악다운 음악을 하는 가수가 거의 멸종되었다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비주류에서는 지금도 음반은 안 팔리지만, 훌륭한 음반을 발표하는 젊은 음악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통로가 막힌 채로 절망감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비주류에서 나온 음악을 듣고 영 탐탁찮게 여기시는 것인지요.

 

-사실 여러 가지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저 나름의 음악세계가 있고, 다른 음악인들은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비교하고 그럴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평가를 잘 안합니다. 저의 음악세계를 형성하고 계속 그리로 갈 생각을 할 뿐이죠. 그래서 다른 젊은 음악인들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음악인들이 세계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선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원로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채찍질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부분에서는 냉정하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제가 뱉는 말에 너무 섭섭하게 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세계적인 음악을 말씀을 하시는데, 관심이 있는 해외의 뮤지션이나 장르가 있으신가요

 

=세계적으로 나오면 인정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아니니까 배가 아픈거죠. 이제는 음악도 어떤 명칭을 붙여서 뭐다 뭐다라고 이름을 붙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단지 음악일 뿐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할 때, 이게 뭐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음악하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반대’ 앞뒤가 잘못됐다

 

-2월 중순에 모 일간지에서 선생님이 스크린쿼터 관련해서 “문화는 결국 작품이다. 작품으로 모든 걸 얘기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영화인의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한 영화인들의 움직임에 반대하셨습니다. 진의는?

 

=스크린쿼터가 필요해서 영화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게 영화인가 하는 생각 들었습니다. 영화다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영화인이고, 배우죠. 뭔가 대항하는 것을 만들어 놓고 영화를 만들고 이런다는 게 이해가 안갑니다. 예술가로서 좀더 자세가 달라야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영화 배급하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은 맞다고 보는데, 배우들이 국회의사당 가서 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갑니다.

 

-음반 시장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음악을 하시는 분들도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제도 개선을 요구합니다. 이런 것들은 창작 환경을 제도적으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유지 요구랑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 저는 요구라는 게 어디다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책적인 건지, 사업적인 건지. 문제는 자기에게 있는 건 아닌가요. 자기 작품이 중요한 게 아닌가 말입니다. 작품이 나온다면 자기에게서 나오는 거지, 요구를 하고 그래서 들어줘서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념이 잘못되지 않았나, 그런 차원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록은 저항이 아닌 자유…코드를 버려라

 

-한국록의 대부로서 록 음악은 무엇입니까.

 

=록은 여러 가지 말이 많습니다. 누구는 저항이라고도 하고요. 저는 자유를 꼽습니다. 인간이 만든 법칙들이 인간을 옭아매는 시대가 자꾸 오니까 록으로써 탈피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음악성도 그렇습니다. 젊은 친구들하고 음악할 때 보면 어떤 법칙이나 틀 속에서 헤맬 때가 있습니다. 저는 다 버리라고 합니다. 코드까지 다 버리라고 합니다. 코드가 무슨 소용있냐, 그냥 좋아서 음악해라. 내고 싶은 소리를 내라. 그게 제가 주장하는 록입니다. 후배나 잘 나가는 뮤지션들이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하고, ‘저 사람이 음악을 모르는 사람인가’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코드가 필요가 없습니다. 코드 자체가 법칙, 규제 아닙니까. 코드 진행에 따라서 뭘 해야 한다면, 거기서 음악이 나와봐야,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음입니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작곡법도 있고, 화성학이 있는데, 그걸 통달하고 나면 자유가 생깁니다. 알고 나면 모든 것을 넘나들 수 있는 힘이 생기죠. 그 때 가서 자유가 있는 거고, 그때 음악을 하는 게 록이다. 기타나 치고 소음이나 낸다면 그게 록이 아닙니다. 록은 자유다라고 말은 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어렵습니다.


- 음악을 안했으면 무엇을 했을 거 같나요.

 

= 어릴 때야 희망이 많고, 대통령이 되고 싶고, 미술을 하고 싶고, 과학자가 되고 싶고 그런 게 있었겠지만, 다 똑같은 거 같습니다. 풀려나갈 때 재능이 반영이 되고 자기 직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다시 생각해봐도 음악밖에 없었던 거 같네요.

 

-이전에는 ‘록의 대부’로 이름을 붙인지가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미국 대중문화의 추종자에서 어느 순간에 평가가 바뀐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평가가 180도 뒤바뀐 것에 대한 소회가 있을 것 같다.

 

=글쎄, 그런 경향은 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시기마다 과정이 있고, 고비가 있는 건데, 그런대로 견뎌온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뭐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넘어가는 데 익숙해져서, 잘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한국의 얼굴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이 문화적인 정체성을 놓고 혼란기를 거칠 때, 선생님도 음악적인 정체성을 찾았구요. 한국이 서구 문명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근대화를 거쳐서,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모색할 때, 선생님도 미8군 음악을 거쳐 한국적인 록음악에 접근했습니다. 그런 문화적인 혼란기 혹은 태동기인 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선생님의 입장에서 정리해 주시죠.

 

=50년대에는 전쟁 거친 후에도 그 나름대로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해방도 겪고 전쟁도 겪다 보니까 문화적인 낙을 찾기 힘들었죠. 그래서 극악단이 어쩌다 오면 문화적인 해갈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스페인의 집시처럼, 돌아다니면서 체질적으로 그렇게 생활을 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서민적인 문화단체들인데, 서커스나. 50년대 뒤죽박죽되었지만, 일본, 중국적인 문화가 혼재되면서 우리 고유의 것을 끈끈히 담지하던 시대였습니다.

60년대는 미 8군의 영향이 강력했습니다. 그들을 보면 전쟁을 하러 온다기 보다는, 문화를 지키는 전쟁을 한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우리는 전쟁을 한다면 음악이든 뭐든 없을텐데, 그들은 음악을 들으러 전쟁을 하러 온 것 같아요. 훈련 시간 끝나면, 클럽으로 와서 음악을 듣고. 어느 부대나 클럽이 세 개가 있어서, 장교와 상사, 사병들이 들어가는 클럽이 꼭 있습니다. 미8군은 당시 현대적인 감각을 파생시키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8군 무대를 통해서 음악이들이 받은 영향은 강력했죠. 미군에서 흘러나오는 물품들도 현대적으로 문화가 바뀌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문화가 70년대에는 록 판으로 정리됩니다. 60년대 문화가 발전을 해서, 영미권에서도 기라성 같은 록 밴드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애니멀스’라는 팀은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 같은 노래를 엄청나게 히트쳐서, 못하는 밴드가 없었습니다. 월남전을 거치면서 사이키델릭 문화가 피어났고요. 전쟁을 거치면서 정신적 타격을 받아서, 젊은이들이 사이키델릭 록이 탄생하는 등, 70년대에는 피크를 이루면서 다양한 음악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당시는 화려했고, 한편으로는 난무하면서, 동시에 순수한 비틀즈 문화가 파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노래가 동양적인 노래를 불렀죠. 미국의 음악이 코드 음악, 동양은 멜로디 음악인데요. 당시 동양적인 음악을 록화시켰습니다. 그 때 '엽전'을 구상한 이유도 한국적인 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인도문화, 동양 음악을 가미하면서 자기들의 록을 만든 것을 보고, 제가 힌트 받은 거죠, ‘아, 한국 것은 없구나’ 싶어서, 한국 가락을 가지고 록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무엇이든 하나에 쏠리는 것은 문제…멀티가 중요

 

-음악인생을 돌아볼 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지금까지도 아쉬운 거야 많습니다. 우리 문화가 일률적으로 있다가 그쪽으로 다 쏠리고 디스코면 디스코, 랩이면 랩, 펑크면 펑크. 한쪽으로 몰리면서 나머지는 버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을 보면 50년대 문화도 보존하고 있어요. 50년, 60대 음악을 다 가지면서 추종자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없어지는 이유가 한쪽으로 몰리니까, 디스코하면 다 몰리면서 그 외에는 다 잊는 거죠. 요즘에는 축구하면 다 몰려서 나머지는 다 타격을 받는 거 같습니다. 경제학 박사는 아니지만, 문화는 중요한 게 멀티문화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중요하게 여기면서 보존해야 하는데, 뭐가 나와도 경제가 흔들리지 않는데, 축구 하나 때문에 다른 장사가 되지 않습니다. 스크린 쿼터제를 예를 들면, 이것 하나 때문에 영화계가 흔들리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멀티문화가 살 수 있는 토양이 갖춰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음악이 작살나는 거지요. 대중음악은 특히나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국악이나 클래식은 극장도 좋은 극장 제공 받고, 콘서트 하기도 좋죠.

저같은 사람이 보조 운동장에 쫓겨 가서 공연을 한다는 게 너무 비참한 거 아닙니까. 국가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17세기 클래식, 국악은 다 좋은데, 현대적인 감각의 음악성은 우리가 보유하고 발전하면서 과시해야 하는 겁니다.

 

-돌아볼 때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제가 묵묵히 일을 해 온 것이 제 의무라고 받아들이고,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때 묻지 않고 버텨왔다고 봅니다.

 

노자·장자 책보면서 버티어왔다

 

-후회되는 순간은?

 

=글쎄, 잘 기억이 안나네요. 상황에 따라 어려운 시기가 있어서, 도망다니면서 음악 하기도 하고, 미 8군에 숨기도 하고, 기지촌 앞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에서 보호해줘서 숨기도 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활동금지를 당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영광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웃음)

 

-대마초 사건 이래에 ‘홀’을 깨달았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어떤 공허함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그 이후의 글을 보면 도가의 배움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합니다.

 


=활동 금지를 받을 때, 심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도가라고 하는데, 가는 빼고, 도를 배운 겁니다. ‘가’로 붙이면 도는 떠난다고 했습니다. 노장의 도는 굉장히 극단적이고, 보통 사람이 접하기 힘들죠. 저는 체질상으로 맞는다고 할 정도로, 접할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배움이 제가 속 상한 것을 해결해줬습니다. 장자를 먼저 봤는데, 장자가 자꾸 노자를 얘기해서 노자를 봤고요. 그 책들을 보고 방향을 찾았습니다. 장자를 몰랐으면 내가 지금 이럴까, 싶습니다. 콘서트도 못하고, 제가 버티질 못했을 거에요. 이후에 해금이 되어서 활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전부 잊더군요. 그렇게 음악을 ‘신중현 사단’이니 뭐니 했어도, 전부 바뀌어서 저를 잊었습니다. 그 때 장자를 통해 비운다는 것, 무위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저에게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릴 힘을 줬습니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얻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죠. 집착을 하면 앞길이 끝나는데, 다 버리고 나니 나를 찾았습니다. 70년대 활동 금지 되었을 때, 장자 책을 처음 접하고, 덕분에 견뎠습니다.

 

- 선생님의 노래들을 한마디 정도로 표현한다면

 

= 음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단순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이 중요한 겁니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이니까. 잡음이 안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가 마음부터 맑아야 하고, 자꾸 노력을 해서 쇠퇴하지 않는, 상하지 않는, 순수한 쪽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 신중현씨가 걸어온 길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출생.

이발사인 아버지 신익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남.

1941년경 만주 신경으로 이주, 아버지 재혼, 배다른 남동생과 여동생이 생김.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복귀

1950년 전쟁 발발과 함께 충청북도 진천으로 이주

1952년 아버지 사망

1953년 어머니 사망

1955년 미 8군에서 공연 시작

1958년 첫 음반 <히키 신 기타 솔로집> 발표

1963년 한국 최초의 로큰롤 밴드 ‘애드훠’ 결성

1964년 애드훠 첫 음반 발표 (‘비 속의 여인’ 등)

1964년경 미 8군 최초 한국인 여성 드러머인 명정강씨와 신촌에서 살림살이 시작

1966년 그룹 ‘덩키즈’ 결성/ 가수 이정화 데뷔 (‘봄비’ ‘꽃잎’ 등)

1968년 ‘신중현 빅 밴드’ 결성/ 가수 ‘펄 시스터즈’ 데뷔 (‘님아’ ‘커피 한잔’ 등)

1969년 가수 김추자 데뷔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등)

1970년 그룹 ‘퀘션스’ 결성/ 가수 박인수, 장현 데뷔 (‘나는 너를’ 등)

1971년 가수 김정미 데뷔 (‘간다고 하지 마오’ ‘봄’ 등)

1972년 그룹 ‘더 멘’ 결성 (‘아름다운 강산’ 등)

1973년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 결성 (‘미인’ ‘저 여인’ 등)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5년간 활동 금지

1980년 그룹 ‘신중현과 뮤직 파워’ 결성 (‘너만 보면’ ‘저무는 바닷가’ 등)

1983년 그룹 ‘신중현과 세 나그네’ 결성 (‘떠나는 사나이’ 등)

1985년 록 까페 ‘라이브’ 운영

1987년 라이브 공연장 ‘록 월드’ 운영

1994년 <무위자연> 음반 발표

1995~1997년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

1996년 신중현 헌정 음반 <트리뷰트 투 신중현> 발매

2005년 신곡을 실은 음반 <도시학>과 과거 노래를 재해석한 음반 <안착> 발매

현재 경기도 용인의 목조 자택에서 인터넷 방송 준비.

3남 중 장남 대철은 그룹 ‘시나위’의 리더로, 윤철, 석철은 ‘서울전자음악단’에서 기타와 드럼을 각각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