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검은 바다, 흰 섬

피나얀 2006. 11. 11. 20:50

 

출처-[뉴스메이커 2006-11-10 15:06]  



길 위의 날들


정녕 꿈이었더란 말이냐
흐르다가 머물고, 흩어지고 휘날리어
끝내, 끝끝내 사라지고야마는
그런 꿈이었더란 말이냐
가슴으로, 가슴으로만 고이어드는
그 숱한 그리움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죄다 꿈이었더란 말이냐

그래 빛이었구나
아득히, 아득히 저어갈수록
사무치고 흐늑이며, 솟구치어 무너지는
그런 빛이었구나
아직 남은 날이 있다면
더 가야 할 길이 있다면
오로지 그 길 위에서만 스러질
마지막 빛이었구나
- 백도


*사실 이 땅의 마지막 비경이라는 백도를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거문도에서 1시간여 뱃길에 몸을 맡겨보라. 가급적 트럼펫 음악(‘두둥실 두리둥실’도 좋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도 좋고)이라도 들으며 새벽안개나 햇살을 뚫고 그 먼 바다로 나가보라. 검푸른 바다 위에 홀연 흰 빛 하나가 솟아오르니 그것이 백도이다. 그 끝의 끝을 흐르며 마냥 눈물겹도록 행복해 할 일이다.

그러다가 문득 백도의 신기루가 들려주는 꿈결 같은 노랫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부터 백도에서는 비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아지려 할 때 수많은 사람이 수런거리는 소리나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로 그 위험을 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어부들이 배를 돌려 거문도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풍랑이 치고 해일이 일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화를 면한 어부들의 믿음처럼 당신도 큰 믿음 하나를 안고 돌아올 일이다. 끝의 끝에서 길은 또다시 새롭게 열리는 것이니.

On road
여수항 - 거문도 - 백도
(거문도관광여행사 061-665-4477, www.geomundo.co.kr)


거문도등대는 100년 동안이나 불을 밝혀왔다. 거문도등대는 100년 동안이나 불을 밝혀왔다.

에이아라 술비야/어기여차 술비로세…술비소리를 잘 맞구보면/팔십명 기생이 수청을 드네… 님을 맞구서 경사로세/에이하라 술비야 -거문도 뱃노래

여수항에서 거문도행 뱃길에 몸을 실으면 바다는 술비소리로 출렁인다. 뱃전으로 흰 포말이 일지만 발밑은 죽음보다 더 깊고 어둑하다.

 

길 위를 떠도는 모든 넋은 그 길 위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못한다. 설령 돌아볼 수 있다 할지라도 이미 길들은 지워지고 없다.

1885년(조선 고종 22년) 4월 15일, 영국함대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구실로 아무런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거문도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22개월 동안 영국군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게 되니 이른바 ‘거문도사건’이다.

 

비록 영국함대는 1887년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의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 철수하였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한반도 해역을 지날 때면 으레 한번씩 거문도에 들르곤 했다.

 

고도(거문도는 고도, 서도, 동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에 남아있는 영국군 수병묘지는 당시의 상황을 묵묵히 증언해주고 있다.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사고로 죽다
- 윌리암 J 메레이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


거문도 뱃길은 검은 빛으로 일렁인다.

영국군 수병묘지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3기의 무덤 앞에 놓인 묘비명은 제법 착잡한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벽안의 이방인들과 희한한 동거를 해야 했던 외딴섬 사람들의 처지도 그렇고, 이역만리 먼 곳에서 숨을 거두고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17세 소년의 넋이 그렇고….

거문도에서 여수로 가는 귀선에 몸을 실으면 섬은 빛의 잔영으로 남는다. 수월산 봉우리의 거문도등대는 세상의 빛이 저물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휘한다.

 

길 위의 모든 넋들은 스스로 배가 아니므로 그 빛이 나아가야 할 빛인지 돌아가야 할 빛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설령 분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길을 가는 건 그 빛의 신호 때문이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