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한겨울에 가을향기를 노래한다

피나얀 2006. 12. 12. 21:53

 

출처-2006년 12월 11일(월) 오후 5:33 [오마이뉴스]



▲ 훌쩍 미련 없이 떠난 줄 알았던 가을이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2006 임윤수

'쌕쌕' 불어대는 문풍지 소리로 겨울노래를 듣습니다. 겨울바람도 숨이 가뿐 듯 문풍지 노래는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합니다. 에누리 없고 살벌한 마음으로 들으면 마냥 삭풍으로 들릴 문풍지소리지만 읊을 수 있는 옛 노래가 있기에 배경음악쯤으로 들립니다.

따뜻한 온돌에 누운 등짝으로 올라온 온기가 마음조차 덥혀줍니다. '웅얼웅얼' 콧노래를 따라 부르노라니 가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눈앞에 아롱거립니다. '후두둑' 가을바람에 떨어져 덧없이 뒹굴던 낙엽들이 그려지고, 햇살을 받아 하얗게 흔들리던 억새 잎도 실루엣처럼 떠오릅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 입술과 콧구멍으로 가을향기가 너울춤을 추며 흔적 없이 스며듭니다. 가는 가을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흔적으로는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가을 햇살이 한 뼘만큼이나 짧아졌던 늦가을 어느 날, 겨우 내내 실컷 쓰고도 남을 만큼의 가을향기를 듬뿍 마음에 담았습니다. 표식이라도 남기려 억지로 스탬프를 찍듯 껍데기에만 찍은 게 아니라 각인을 하듯 마음에까지 꾹꾹 가을 흔적을 찍고 담아 왔습니다.

▲ 이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늦가을 노스님께서는 자잘한 산국 꽃을 모으고 계셨습니다.
ⓒ2006 임윤수

▲ 얼마나 오랫동안 꽃을 모으셨는지 바구니에 가득합니다.
ⓒ2006 임윤수

▲ 그냥 내버려 두면 낙엽이 되거나 말라비틀어질 꽃들입니다.
ⓒ2006 임윤수

성큼 겨울바람이라도 짓궂게 다가오면 남아 있던 꽃잎들마저 모두 동사해 버릴 만큼 늦은 어느 가을날, 터벅터벅 찾아간 산사에서 뵌 노스님께서는 가을 흔적을 거두고 계셨습니다. 자질구레할 만큼 잔잔한 산국화들을 알곡을 거두어 내시듯 한 송이 한 송이를 거두고 계셨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낙엽이 되거나 말라비틀어질 꽃잎들이지만 스님의 손에서 거둬진 꽃들은 칠보라도 되는 양 하나하나가 정성스레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참선이라도 하듯 꼿꼿한 자세로 앉아 헛되이 버림받는 꽃들이 없도록 산국 가지를 꼼꼼하게 추스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꽃잎들을 거두셨는지 커다란 바구니가 노란 꽃들로 가득합니다.

그냥 하나의 산국으로 있을 때는 별것 아닌 듯 보이더니 이렇듯 하나의 바구니에 담겨지니 황금빛 화장세계를 이룹니다. 콧방울을 벌름거리지 않아도 진한 산국향이 눈빛을 따라 마음으로 파고듭니다. 한바탕 벌 나비가 되어 폭신폭신 꽃 속에 노닐고 싶다는 유혹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 그렇게 모아진 꽃들은 맑은 물이 철철 넘치는 샘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006 임윤수

▲ 자잘한 산국들이 뽀얗게 닦였습니다.
ⓒ2006 임윤수

▲ 먼지가 묻어있던 꽃들이 청정한 꽃들이 되었습니다.
ⓒ2006 임윤수

온전한 가을 냄새만 남기기 위해서인 듯 바구니 가득 채워진 꽃들은 맑은 물 철철 흐르는 샘가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정성스레 뽀얗게 닦였습니다. 깨끗하다 못해 맑아지도록 여러 번에 걸쳐 닦아진 꽃들은 가을 햇살을 받으며 고스란히 말랐습니다.

세파의 먼지들은 씻긴 지 이미 오래니, 욕심처럼 움켜잡고 있던 물기들조차 남김없이 버리고 나니 깔끔하고도 노란 빛깔로 가을향이 되었습니다. 버릴 것 다 버리고 알짜 가을향기만 끌어안고 있는 노란 산국은 얇은 부직포주머니에 넣어져 예쁘게 포장되었습니다.

그렇게 가을향기를 담은 산국 주머니를 스님께서 가을 선물로 건네주셨습니다. 산국주머니에서 가을향이 나니 문풍지 울어대는 겨울이지만 방안에만 들어서면 가을을 노래합니다.

▲ 뽀얀 부직포주머니에 담겨진 산국은 가을향기로 겨울 방안을 덥혀줍니다.
ⓒ2006 임윤수

부직포주머니에 담겨진 노란 산국들이 '머리카락 보인다'를 외치던 술래처럼 머리맡에서 가을향기를 퐁퐁 쏟아내고 있습니다. 창문 저만치에서는 겨울삭풍이 불고 있을지언정 들려오는 문풍지소리조차 옛 노래로 읊을 수 있는 것은 가을향기를 만들고 건네 준 정성과 큰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금년 겨울이 제아무리 춥고 삭풍이 불어와도 산국 향을 맡으며 행복해 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