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퇴락한 살림집에서 읽은 초겨울의 쓸쓸함

피나얀 2006. 12. 13. 22:16

 

출처-[오마이뉴스 2006-12-13 10:07]



▲ 문간채에서 올려다 본, 굳게 닫힌 성벽같은 '여자 사랑채'의 모습
ⓒ2006 서부원

웬만해서는 이 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안내 표지판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인근 마을 사람들조차 존재를 잘 모르는 까닭에 주소만 달랑 들고 집배원이 이 집 저 집 드나들 듯이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덕동리 도천골.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나주 들녘의 언저리를 헤매 다니다 간신히 찾았습니다. 나주시 남평읍에서 봉황면으로 가는 819번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다도면 방향으로 접어들면 곧장 야트막한 둔덕 아래 소담한 마을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여느 한적한 농촌 마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곳에 대략 150여 년 전 남도의 튼실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민가 한 채가 남아있습니다.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홍기종 가옥’이 그것입니다.

묵직한 돌로 세워둔 마을 표지석을 지나 대략 1㎞ 남짓 되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굽이굽이 오르면 막다른 길, 가장 높은 곳에서 마을을 조망하듯 서 있습니다.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초가지붕의 문간채는 굳게 잠겨 있고, 벽이 이어져 있었을 곁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게 되어있습니다.

2단의 높다란 석축 위에 생김새가 다른 두 건물이 얹혀 있는데 마치 육중한 성곽 같습니다.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깔리듯 벽면에 비치니 더욱 장중한 느낌을 줍니다. 두 건물 모두 사랑채인데, 널따란 툇마루가 시원하게 트인 오른쪽 건물은 바깥어른의 생활공간이고 창문 몇 개만 틔어 있는 왼쪽 것은 이 집에 기거하던 ‘작은’ 안주인들의 거처라고 해서 ‘여자 사랑채’라고 합니다. 여느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 서쪽을 보고 있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는 사랑채 모습.
ⓒ2006 서부원

특이한 것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아무리 집이 들어앉은 지형을 감안했다지만 전체적인 앉음새가 (보편적인 좌향인 남쪽도, 그렇다고 동쪽도 아닌) 서향입니다. 굳이 이해해보자면 이 지역을 경계로 해서 서쪽은 드넓은 나주평야가 이어지고, 동쪽은 나주호 건너 족히 4∼500m가 넘는 산지가 첩첩이니 트인 곳을 향해 자리 잡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성벽을 거슬러 오르듯 곁으로 난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반듯한 직사각형의 안채 마당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에서 보는 두 채의 사랑채는 이내 반대의 양상을 띱니다. 문간채에서 볼 때 개방적이었던 사랑채는 벽만 두텁고, 외려 ‘여자 사랑채’는 툇마루를 길게 뽑아 틔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자 사랑채’는 위치와 이름만 사랑채일 뿐 쓰임새에 있어서는 안채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사랑채와 수직 방향에 현재 집주인 내외가 살고 있는 안채가 보란 듯 서 있습니다. 문간채와 사랑채, 광 등 건물들은 많지만 안채 하나를 제외하면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 집 전체적으로 퇴락한 기운이 역력합니다. 그나마 빨래가 널려 있고, 신발이 놓인 모습이 그나마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어 전혀 어수선해 보이지 않습니다.

▲ 주인어른 내외가 기거하는 안채의 모습. 저 멀리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곳이 부엌이다.
ⓒ2006 서부원

안채 옆, 사랑채와 나란한 방향으로 지금은 다 쓰러져 가는 창고 건물 하나가 힘겹게 서 있지만, 본디 이곳에는 다섯 칸 짜리 별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주인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해방되고 6. 25 전쟁을 겪으면서 건물 몇 채가 불타기도 하고 적지 않은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급격하게 쇠잔해졌다고 합니다. 그나마 건물 두어 채가 온전히 남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유일하게 사람 냄새가 훈훈하게 밴 안채는 이 집에서는 유일한 남향입니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널찍한 툇마루에 햇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을 만큼 따뜻한 느낌을 주는 건물입니다. 가장 왼편에 있는 부엌은 공간을 넓게 사용하려는 이유에서인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T’자형을 이루도록 앞뒤를 반 칸씩 튀어나오도록 했는데, 실용성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또 건물 앞뒤로 제법 넓은 툇마루를 뽑았는데, 바닥에 깐 나무가 뒤틀리지 않도록 굵은 쇠못을 군데군데 박아둔 점도 여느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입니다. 사각기둥, 서까래부터 문지방에 이르기까지 굵은 목재를 사용한 탓에 튼실한 짜임새가 느껴지고 이 집을 지을 당시의 넉넉한 살림살이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 툇마루가 뒤틀리지 않도록 굵은 쇠못으로 고정해 둔 것이 이채롭다.
ⓒ2006 서부원

안채 바로 뒤편에 사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숲만이 빼곡해 흔적을 더듬기조차 어렵습니다. 산책하듯 집을 둘러보는 동안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대숲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립니다.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해 떨어진 어스름한 저녁에 이곳을 찾았다면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웠을 것 같습니다.

야트막한 산에 기댄 이곳이 명당이라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는 이 집은 키 큰 대나무들이 집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폐쇄적인 요새와도 같습니다. 2단으로 된 높다란 석축 위에 성벽처럼 이어진 건물들의 이어짐도 그렇지만, 시내버스 다니는 도로에서도 아예 격리되어 있고, 인근의 덕동 마을과 외따로 떨어진 채 토라져있는 위치를 통해서도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 장방형의 안채 마당에서 본 안채와 스러져가는 광의 모습. 이 집에서 유일하게 안채만이 남향이다.
ⓒ2006 서부원

외진 곳에 숨어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건물들의 퇴락한 모습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읽습니다. 굳이 의도하고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 집은 초겨울 꼭 이맘때 느낄 수 있는 을씨년스러움을 닮았습니다. 찬찬히 둘러보고 돌아서려니 주인어르신께서 식혜 한 그릇 하고 가라 시며 손짓 하셨습니다. 자상함 가득한 그 말투와 표정이었지만 외로움이 매우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150여 년 전 터를 닦고 이 집을 지을 때의 넉넉함과 풍요로움은 스러져 가는 건물처럼 사라져가고, 그 자리에 주인어르신의 허연 백발에 비친 쓸쓸함만 가득 남았습니다.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지만 보존도, 복원도, 수리도 다 관심 없다는 듯 헛헛하게 웃어 보이는 어르신의 얼굴에서 이 집의 현재를 가장 또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홍기종 가옥'이라는 이 집의 이름은 현재 이곳에 살고계시는 어르신의 성함을 딴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10일) 오후 늦은 때에 불쑥 찾아든 '객'에게 자상한 말씀과 함께 친절을 베풀어주신 데 대해 이곳을 통해 감사의 말씀 전해올립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